▲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무신정변 후 3년이 흐른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추구하는 '김보당의 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로 끝났다. 의종은 다시 체포되어 유배된다. 그해 10월, 의종은 유배지에서 무신세력에 의하여 처참하게 시해당한다.
의종을 직접 살해한 인물은 바로 이의민이었다. 놀랍게도 이의민은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의종의 척추를 부러뜨려서 살해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이 의종의 척추를 꺾어버렸는데 손을 놀리자 소리가 나니 이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왕족인 왕씨는 '용의 후손'으로 불리었다. 폐위되었다고 해도 왕손을 죽인다는 것은 천인공노할 대사건이었다. 심지어 이의민과 동행했던 무장 박존위는 의종의 시신을 이불에 싸서 가마솥 두 개에 함께 묶어서 연못으로 던져넣는 시신유기까지 저질렀다. 명분없는 찬탈을 저질러서 권력을 장악한 무신정권의 잔혹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의종의 최후에는 더 씁쓸한 뒷이야기도 전한다. 이의민 일당이 떠난 이후, 한 승려가 물속으로 들어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의종의 시신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그래도 일국의 국왕이었던 의종이 가마솥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인심을 잃었거나, 고려의 왕권이 그만큼 추락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한편으로 역사에서 의종의 죽음은 무신정변 이전 고려 전기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의종의 사망으로 더 이상 고려는 무신정변 이전의 사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무신정권은 이후 백 년 가까이 장기간 지속되어 국가의 행정과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었고, 고려는 무신정권이 종결되고 국가가 끝내 멸망할 때까지도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의종 시해가 이의민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닌, 배후에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방이나 정중부의 사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의민으로서는 본인의 생존과 출세를 위하여 자신이 모시던 주군을 배신가면서까지 '무신정권의 하수인' 노릇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임금을 살해한 천인공노할 사건은 이후 두고두고 이의민의 발목을 잡는 정치적 족쇄가 된다.
이의민은 의종 사후에는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무신 최고위 관직인 상장군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출세가도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의민은 여전히 무신정변의 주축세력도 집권무신도 아닌,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무신들 사이에서는 권력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신정변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고는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또다른 반란을 기획하다가 이의방에게 적발되어 숙청 당한다. 또한 이의방은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기습을 당하여 암살 당하고, 권력은 정중부의 독주체제로 넘어간다.
1179년,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이 결사대를 이끌고 궁을 습격하여 정중부 일파들을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해정변이 일어난다. 정중부가 제거되면서 이로써 무신정변을 일으킨 1세대 주역들은 이의민을 제외하고 모두 퇴장한다.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은 기존의 무신들과 달리 유일하게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고를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경대승은 자신의 집권을 축하하기 위하여 열린 연회에서 사람들에게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는 당연히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이의민은 경대승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두려워했다. 하지만 경대승으로서도 많은 전공을 세워 상장군의 지위까지 오르고 사병세력까지 갖춘 이의민을 섣불리 제거하려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후 경대승이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을때 이를 오해한 이의민이 경대승을 비웃는 악담을 한 사실까지 탄로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이의민은 경대승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고향인 경주로 낙향한다.
하지만 1183년 경대승은 복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불과 집권 4년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돌연 요절한다. <고려사절요>에는 경대승이 죽은 정중부가 성내고 꾸짖는 꿈을 꾼 이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실 경대승은 젊은 나이에 정권을 잡아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고를 주장하면서 국왕 명종과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경대승은 많은 무신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를 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 오른 이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