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도 총각보쌈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글에는 연산군이 쿠데타를 당한 1506년 이전에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을 방문한 선비가 등장한다.
선비는 통행금지 시각인 인정(人定, 10시 12분) 뒤에 지금의 명동성당과 을지로입구역 근처인 구리개에서 납치를 당했다. 가죽 포대에 싸인 그는 부잣집 여성 앞에 가게 됐고, 새벽이 되자 다시 포대에 넣어져 원래 위치에 놓이게 됐다.
이 사건은 선비가 명동성당 근처에 미련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이듬해에도 다시 전처럼 과거에 응시하러 경사(京師)에 가게 되자 매일 밤 인정 때마다 구리개에 가서 일부러 어정어정 머뭇거려 봤지만 끝내 가죽 포대를 만나지 못했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총각보쌈 풍습을 반영하는 이런 이야기가 <어우야담>에 실린 것을 근거로 위 논문은 "시기적으로 <어우야담>이 <청구야담>보다 200년 이상 앞서 있다"라며 "총각보쌈이 과부보쌈보다 더 오래된 관행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다. 이 논문에 인용된 김현룡의 <한국문헌설화 3>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총각보쌈과 과부보쌈은 상호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두 사회문제의 맥락은 서로 닿아 있었다. 홀아비보쌈이나 처녀보쌈은 별로 부각되지 않은 데 반해, 총각보쌈과 과부보쌈은 사회문제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각보쌈이 많아진 것은 과부에 관한 법적 제약과 관련이 있다. 이 보쌈의 목적은 총각을 진짜로 결혼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낯선 총각을 이용해 자기 딸이 과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이 과부가 되면 사회적 불이익이 많았다. 본인 못지않게 자녀에게도 제약이 많았다.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편은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를 거론한 뒤 이들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생원시+진사시)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제약들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기 딸이 과부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런 염려에서 딸의 사주팔자를 보는 부모들이 많았다. 장정들을 동원할 경제적 여력이 있는 부모들 중에는 총각보쌈을 해서라도 딸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과부보쌈은 공식 재혼을 꺼리는 여성들이 사실상 재혼하는 통로로 활용됐다. 이 역시 과부 재가에 대한 법적 제약과 관련된 제도였다.
이처럼 과부보쌈과 총각보쌈은 과부에 대한 법적 제약에 똑같이 기원을 뒀다. 이 중에서 총각보쌈이 먼저 사회문제가 되고, 과부보쌈이 그 뒤에 부각됐다. 과부 재가에 가해지는 법적 제재에 대한 두려움이 처음에는 딸의 운명을 바꾸고자 총각보쌈을 하는 풍습을 낳고, 그 뒤에는 과부가 된 여성의 실질적 재혼을 돕는 과부보쌈이라는 풍습을 낳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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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