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라이프 고즈 온"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씨네소파
영화의 출발은 모 방송국 팟캐스트 방송에서 비롯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세월호 유가족 '예은아빠' 유경근은 대담 파트너로 자신이 겪은 기막힌 체험을 먼저 치렀던 이들과 차례로 대면한다. 황명애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 고(故) 한상임 어머니인 황명애, 1999년 씨랜드수련원 화재 참사 희생자 故 고가현, 고나현 아버지인 고 석, 1987년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국가폭력으로 사망한 故 이한열 열사 어머니 고(故) 배은심이 그들이다. 자식의 시신을 찾은 뒤 오히려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던 진행자 유경근은 자신이 경험한 기막힌 체험을 이미 오래전에 먼저 겪은 이들과 대화하면서 오히려 안정을 찾고 그들과 공감하며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참 잔인한 표현이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위로 효과도 있었을 법하다.
그 과정에서 유경근과 이 과정을 기록하던 카메라 너머의 감독은 기이한 점을 발견한다. 2014년 세월호 ↔ 2003년 대구지하철 ↔ 1999년 씨랜드수련원은 각각 다년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마치 평행우주를 보듯 닮은꼴이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믿을법한 공신력을 가진 거대 여객선/공공 대중교통시설/허가받은 대형 레저시설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황당한 안전사고가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혹은 최소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부분조차 무력하게 놓쳤다는 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명을 희생시키고도 유해 수습조차 졸속으로 대충 처리했다는 점, 게다가 진상규명은 뒷전이고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정당하게 항의하는 유족들을 핍박했다는 점까지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대체 왜 이런 참사가 반복되는 걸까? 그저 어쩌다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이 묘하게 일치하는 걸까? 그저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니 재수가 없는 걸까? 유가족들은 반문한다. 차라리 그렇다면 슬픈 과거를 묻어두기엔 오히려 나을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짚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이들은 현실을 망각하는 '파란 약' 대신에 진상을 규명하고 교훈을 남기려는 '빨간 약'을 선택하고 만다. 그 결과는 팟캐스트에서 이들이 담담하게 토로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난의 기록이다. 유경근은 어찌나 자신과 흡사한 경험담들인지 화들짝 놀랄 지경이다.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은 말한다. 참사현장 수습이 끝났다며 현장 전역을 고압호스로 물청소를 하고 난 뒤에, 도저히 의심스러워 유가족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현장을 한 번 더 샅샅이 수색해보니 백단위의 뼈를 추가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식 사망자 192명에 포함되지 않은 이의 유해도 찾아냈다고 한다. 192명은 오직 객차에서 발견된 시신에 불과하고, 차량 밖으로 튕겨나갔거나 하면 공식조사에서 누락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세월호 또한 기를 쓰고 인양이 무익하다며 가로막던 정권이 몰락하고 인양 후 숱하게 유품과 유해가 발견된 바 있었다.
씨랜드수련원 화재 참사 유가족은 말한다. 애초에 시설 허가가 내려질 수 없는 조건에서 안전 조건을 무시하고 세워진 수련원이 버젓이 영업을 했고, 화재에 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재로 이뤄진 노후시설에서 불이 나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공공기관에선 필사적으로 부주의에 의한 '인재'라 주장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모기향을 피워놨다 불이 번졌다는 것이다. 화면에는 분노한 유가족들의 '모기향' 항의구호가 가득 들어찬다. 노후된 중고선박에 일상화된 과적과, 석연찮은 사건 발생 전후 처리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던 유경근은 말문을 잃고 만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우 외에도 현대 한국사회를 뒤흔들다 기억에서 사라져간 무수한 참사를 회고한다. 복사해서 붙여놓은 양 시기마다 반복되는 동일한 패턴이 개별의 참사를 초월한 '사회적 참사'의 연대기를 완성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기득권 카르텔이 수익을 위해 혹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방조한 안전문제를 이 유가족들이 앞장서서 또 다른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출연자들은 모두 그날의 사건 이후로 지역과 분야에서 안전문제를 고민하고 활동하며 국가가 해야할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유경근 또한 그렇게 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덕분에 여전히 이들은 공권력에겐 불편한 대상이 된다.
'슬픔의 공동체'가 한국사회에 제공하는 선물이자 해법을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