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돛대>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1.
돛대
한국 / 2021 / 23분
감독: 이주승
삶의 막다른 곳에 내몰린 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리는 모습을 보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우리 생의 마지막에 놓인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지금과는 반대로 죽음에서 시작해 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었다면, 우리는 어렵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살아갈 생각을 먼저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모진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 모두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중에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다시 마음을 고쳐 먹는 이들도 있다.
"은구씨는 연기를 못 해요. 이건 안 늘어. 그만둔다고 절대 안 죽어요. 그만둔다는 것도 대단한 용기야."
이 작품 <돛대>에 등장하는 은구(이주승 분)도 어려운 현실 속에 놓여 있다. 10년 가까이 긴 시간을 배우로 버텨왔지만 변변찮은 배역 하나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곁을 떠나고 만 여자친구와 이상한 투자 정보만 흘려대며 꼬드기는 친구와 자신으로 인해 곧 큰 피해를 입게 될 친한 동생뿐이다. 영화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며 무너져만 갔던 그의 과거와 이 생을 정리하기 위해 바다로 향하는 은구의 모습을 교차하며 바라본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명희 누나(이상희 분)는 이 이야기를 뒤흔드는 유일한 장치다. 오래 연락하지 못한 옛 친구 명준의 누나. 동생을 만나러 간다는 그녀를 따라나서게 되면서 은구의 현재가 조금씩 변하게 된다. 죽음 하나의 목적으로만 내달리던 은구의 현재가 명희의 개입으로 인해 그녀의 현재와 그동안 잊고 지냈던 명준의 지난 시간과 함께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행은 은구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시작점이 된다.
명희가 은구를 데리고 향하는 곳은 바다다. 처음 은구가 가고자 했던 장소와 동일하지만 이제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의 삶을 그만두기 위해 향했던 공간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존재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 시체도 찾지 못했다는 동생을 기억하기 위해 누나는 바다장처럼 명준을 만나러 바다로 온다고 말한다. 죽기 위해 떠났던 길 끝에서 만난 친구의 죽음. 은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눈이 내가 아는 눈인데, 마이 힘드나?"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서 미래 사실에 대한 작은 힌트만을 남긴 채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친다. 극의 플롯만 따르자면 그 힌트는 바로 목전에 놓인 담배의 마지막 개비, 우리가 돛대라고 부르는 통속적 상황과 연결된다. 역시 명희의 개입으로 인한 에피소드다. 하지만 인물의 내면이 포함될 서브텍스트까지를 모두 고려하면 역시 이 장면부터가 아닐까 한다. 은구와 마주 앉아 밥을 먹던 명희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아직 그와 관객들이 모르는 사실, 명준의 죽음에 대한 복선도 함께 깔려 있다. 그녀가 이미 죽기 직전에 놓인 사람의 눈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은구의 감춰진 결심이 무엇인지 알아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장면이 영화의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알아봐 주고 그 내면을 들여다봐줄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 삶을 지지해 줄 돛대와 같은 사람 하나쯤 움켜쥐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말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모습이라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또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배우 이주승의 연기와 연출 모두가 인상 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