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워 킬링 문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은밀한 폭력 뒤 자리한 검은 욕망
모든 폭력 뒤에 석유가 있다는 사실은 선명하다. 오세이지족의 광대한 토지에서 검은 원유가 뿜어져 나온 뒤부터 이들을 겨냥한 음모가 차근차근 실행되었으니 말이다. 법적으로는 제 땅에서 나온 부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연방정부는 너무 멀리 있었고 눈 앞의 적은 너무 강했다. 누구도 오세이지족을 도우려 들지 않았고, 영화 가운데 나오는 대사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폭력적인 야만인 취급을 하기도 했다. 법과 폭력 모두에 노출된 오세이지족은 그로부터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갇혀 갈수록 쪼그라들었고, 마침내 2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만이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최근 국제뉴스로 전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또 체첸이나 위구르, 중남미 몇몇 국가의 사정을 떠올리게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누군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그저 두 나라의 문제이며 하마스의 테러행위로 발발한 것이라 이해하지만, 누군가는 이 전쟁이 최소한 지난 십 수 년 동안 이어졌으며 길게는 시오니즘이 현실화된 1차대전 이후부터 이어져온 것이라고 바라본다. 국제사회의 묵인 속에서 서방으로부터 인정받고 심지어 존중받는 강건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자행한 폭력은 심각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거주구역은 갈수록 좁아들고 있으며 살아남은 이들조차 제 생명과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져 왔다. 국가적 정체성은 인정받으면서도 정식 국가로서의 기본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으면서도 혼자서는 처분할 수 없는 오세이지족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세이지족에게 워싱턴DC와 미 연방 대통령이 멀리 있듯이, 팔레스타인에게도 국제사회와 국제기구가 멀리 떨어져 있다.
둘 모두에서 에너지며 토지를 둘러싼 이권이 깊이 개입돼 있으며 인종과 종족, 종교와 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갈등도 자리한다. 힘의 심각한 불균형 가운데 약자를 고사시키는 전략을 수행하는 강국이 비단 이스라엘 만이 아닌 현실을 돌아보면, 그리고 무엇보다 1945년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면, 이 영화와 오늘날 중동의 비극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
데이비드 그랜의 책 <플라워 문>을 바탕으로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이 대작은 그저 100년 전 미국 땅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스크린을 넘어 현실을 겨냥하며, 강자의 위선과 폭력을 거침없이 까발린다. 에너지를 전적으로 수입하는 나라로, 중동의 정세에 민감할 밖에 없는 한국에서 국제뉴스를 바라보는 편협하고 치우친 시선이 개탄스러울 때가 많다. 장자와 이솝이 이야기했듯, 때로는 사실보다 우화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영화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