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언제나 버겁다. 어떤 상실은 한 순간에 닥쳐오고, 또 다른 상실은 서서히 다가온다. 그중 무엇이 더 괴로운가를 따지는 건 무용한 일이다. 빠르든 늦든 모든 상실이 닥쳐오리란 것을 알 뿐이다.
어렸을 적엔 삶이 무엇을 얻어가는 과정이라 믿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삶은 모든 것을 허락한 것처럼 굴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그 모두를 앗아간다. 그리하여 삶은 비정하다. T. S. 앨리엇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 노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짐작한다. 만물이 태어나는 봄이란, 마침내 죽고 말 것들이 태어나는 때이므로.
나의 어머니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다. 파킨슨이라 불리는 이 병은 그 자신에게, 또 그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해소될 길 없는 고통을 안긴다. 완치를 기대할 수 없는 질병이란 인간을 무력하게 한다. 상실의 고통을 잘게 쪼개어서는 매일 한 움큼씩 건네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어머니를 매일 조금씩 잃어간다.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이가 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건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는다. 그들 각자가 감내하고 있을 고통을 나는 멀찍이 서서 그저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를 매일 조금씩 잃어가는 딸
여기 비슷한 이가 있다. 산드라(레아 세이두 분)는 아버지를 매일 조금씩 잃어간다. 한때는 존경받는 철학교수였던 아버지(파스칼 그레고리 분)다. 세상 모든 것에 명확하게 다가서 구분하려 했던 명민한 아버지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제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다.
10년 넘게 앓아온 신경퇴행성 질환은 그에게서 시력을, 인지능력을, 다시 또 많은 것을 하나씩 앗아갔다. 하루 몇 번씩 들르는 것만으로는 그를 더는 돌볼 수 없어 가족들은 요양원을 알아본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조금쯤 무너져 내리게 하는 장면이 있다. 산드라가 아버지의 책들 가운데서, 보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책들을 나눠받은 어느 제자의 서재 앞에서 읊조리는 말이다. 이 책들을 가져가주어서 다행이라고, 이 책들 가운데 아버지가 있다고, 저기 병원 병실에 있는 육신은 껍데기일 뿐이라고, 나는 내 아버지를 이 책들 가운데서 느낀다고, 산드라는 제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는 어린 딸 앞에서 하염없이 이야기한다.
'할아버지가 쓴 것도 아니잖아요'하는 딸에게 '직접 고른 거잖아'하고 답하는 산드라의 모습이 애처로와서 나는 거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매일 조금씩 저를 잃어가는 퇴행성 질환이 그 질환을 앓는 아버지를 10년 넘게 보아온 딸을 어떻게 무너뜨려가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아서였다.
누구에게나 살아내야 할 일상이 있다
영화는 산드라의 일상을 비춘다. 남편이 죽고 여덟 살 난 딸을 홀로 키우는 산드라다. 통번역 일을 하고, 하루에 세 번씩 혼자 사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어린 딸을 챙기다보면 하루가 순식간이다.
매일이 똑같을 것만 같던 산드라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하나는 아버지의 병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살 요양원을 구하는 일부터,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는 일이 언제고 다가올 이별을 실감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옛 친구 클레망(멜빌 푸포 분)이다. 남편의 친구였던 그는 몇 년 전 연구차 남극으로 떠나갔던 모양인데, 얼마 전 돌아와서는 파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떠난 뒤 사랑은 제 것이 아니다 여겼던 산드라지만, 클레망과의 만남은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다.
가족이 있는 클레망과 미묘한 만남을 이어가는 산드라다. 그 만남이 때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또 때로는 그녀를 무너뜨린다.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삶으로부터 유일한 해방구가 되어주는 그와의 만남을, 산드라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아내와 아들을 배신한다는 괴로움과 산드라에 대한 열망 가운데 고민하는 클레망, 이를 무력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는 산드라의 모습이 관객에게 쉬운 도덕적 판단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마침내 닥쳐온다
좌충우돌하는 둘의 감정 사이, 일어날 일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아버지는 갈수록 쇠잔해지고 딸은 매일이 새롭게 자라난다. 딸의 성장통과 아버지의 쇠락을 번갈아 비추는 이 영화의 연출이 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산드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잠들기 전 아파하는 딸에게 "몸이 자라려고 하는 거야"하고 말하는 산드라의 대사가 서럽다. 딸의 고통은 성장을 위해서지만, 이미 커버린 산드라의 고통 뒤엔 오로지 쇠락뿐일 걸 알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이를 희망차게 키우지만, 그 아이가 모두 자란 뒤엔 마지막 남은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산드라와 클레망의 불타는 사랑 또한 언젠가는 클레망과 그 아내의 관계처럼 싸늘하게 식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이야기한다. 온갖 불행으로 점철된 산드라의 삶 가운데도 어느 멋진 아침이 있다는 것을, 매일 무너지는 아버지의 정신 속에도 여적 중요한 사람과 기억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 모든 상실을 감당하며 인간은 살아간다는 것을, 인생이 죽음을 향한 상실의 과정일지라도 그 길 가운데 제법 찬란한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아직 귀한 무엇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일은 아직 갖지 못한 귀한 것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는 그 모두를 잃어버릴지라도 아직은 좋은 것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살아가지 않겠는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 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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