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더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 시공간적 규모의 미학에 일가견이 있는 놀란 감독은 이를 위해 세 가지 중층 플롯을 구사한다. "서사보다 플롯을 먼저 고민한다"는 놀란 다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범상치 않은 선택이요, 거듭되는 질문들을 위한 일종의 영화적 야심이다.
먼저 '핵분열'이란 부제 아래 대학 시절 이후 오펜하이머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축으로,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고초를 겪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비밀 청문회가 컬러로 이어진다. 흑백의 '핵융합'이란 부제는 미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개 청문회인데, 놀란 감독이 이 플롯을 중시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맥거핀에 가까운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과의 짧은 만남을 두고두고 복기하는 스트로스는 매카시즘을 등에 업고 오펜하이머의 반대편에선 과학자를 대변한다. 미국의 정치가 오펜하이머를 이용했다면 스트로스와 같은 과학자들은 당대 아이콘으로서 물리학의 스타가 된 오펜하이머를 질시했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책임 윤리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파괴하고 몰락시키려 들었던 매카시즘(정치)과 그 광풍을 이용한 내부 동조자들의 질문을 집요하게 담아내면서 역으로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강화했다.
<오펜하이머>는 다큐가 아니다. 그가 핵폭탄 개발의 처참한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그걸 알면서도 미군의 부름에 흔쾌히 응했는지를 명확히 짚어내지 않는다. 스트로스의 청문회를 비롯해 질문의 연쇄가 <오펜하이머>의 중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안 머피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끝까지 오펜하이머를 신임했던 군 간부 레슬리 글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에 따르면, 놀란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은 오펜하이머의 1인칭 시점이 도드라졌다고 한다. 청문회 장면을 제외한 연대기 장면들이 실제 그렇게 찍혔다.
핵분열이나 핵융합 장면이 삽입된 상당히 지적인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스크린 위에 펼쳐낼 땐 확실히 황홀하다. 꿈결 같은 전개다. 대신 그 꿈결 같은 황홀함은 이내 죄책감에 찌든 악몽으로 변모해 간다. 놀란 감독은 그러한 의식의 변화 과정 자체가 (핵개발을 책임진) 과학과 과학자가 지녀야 할 책무요,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마땅히 감당해야 했을 윤리의식의 모순과 아이러니라고 본 것 같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과학 덕후 영화감독이 세상을 구원하거나 끝장낼 수 있었던 과학자의 심리를 극단까지 쫓아가 본 역사 전기라 할 수 있다. 그 과학자를 괴롭힌 정치의 끝에 2차 세계대전 직후 드리워진 매카시즘이 자리하는 미국의 역사 자체가 상당히 아이러니한데 이를 그 누구도 아닌 놀란 감독이 철저히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과학 덕후로서의 깊은 분노가 느껴진다고 할까.
놀란 감독의 절정에 달한 기교 외에도 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일대기를 집대성하기 위해 뭉친 할리우드 일급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3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빠지는 배우가 없다. 심지어 다소 납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연기한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를 연기한 에밀리 브런트나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갔던 연인 장 태틀록 역의 플로렌스 퓨마저도 말이다.
그리하여 <오펜하이머>는 특히 북핵의 위협이 상존하고 패전국인 일본과 갈등이 여전한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 준다. 오늘을 사는 과학의, 과학자들의 현재적 윤리 의식을 과연 어떻게 담보해낼 것인가. 또 놀란 감독이 강조한 것처럼, AI 시대를 사는 우리가 또 다시 오펜하이머의 세계를 목도하지 말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그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세계를 통해 좋든 싫든 '미국'의 거장에서 세계의 거장으로 거듭나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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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