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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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봤다는 한 아이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해녀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해도, 여자 배우의 비중이 압도적일뿐더러 성별로 선악이 확연히 갈린다며 의도된 설정이라고 단정했다. 아이의 말투엔 다소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묻어났다.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려는 설정도 되레 몰입을 방해한다. 울긋불긋 촌티 나는 배우들의 복장과 복고풍의 머리 모양도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색바랜 흑백 필름 위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만 두드러지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과유불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모조모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2시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흥미진진한 영화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명불허전 연기력이 영화 속 다른 모든 모자란 부분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 그들을 최고의 배우라고 손꼽는지 대번 수긍하게 될 것이다.
'대배우' 김혜수와 염정아의 '케미'에다, 조인성과 박정민의 악역 경쟁은 점입가경의 흥분을 일으킨다. 덩달아 조연 배우조차 환상적인 연기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어 영화를 힘있게 끌고 나간다. 그중에도 다방 마담 역의 고민시는 능숙하고 노련한 중견 배우의 느낌마저 풍긴다.
무엇보다 장면마다 맞춤한 배경 음악이 압권이다. 장면이 전환될 때 잠시 눈을 감으면, 삽입된 음악이 배우들의 대사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70년대라는 걸 굳이 복장이나 다른 소품들을 통해 보여줄 필요가 없다. 배경 음악 하나로 충분하다.
서로 속고 속이는 밀수꾼들이 배를 타고 나설 때 들려오는 노래 '앵두'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로 시작된다. 밀수품을 싣고 바람을 가르며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경쾌한 리듬의 김 트리오의 '연안 부두'가 관객들의 흥을 북돋운다. 다들 한몫 잡은 뒤, 돈을 흥청망청 쓰는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는 가수 송대관의 목소리가 맞춤한다.
시나리오에 맞춰 적절한 곡을 찾아 깐 건지, 아니면 70년대 히트곡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쓴 건지 헷갈릴 만큼 기막히게 어울린다. 일례로, 극중 인물 권필삼은 월남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권 상사로 불리는데, 배경 음악으로 사용된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모티프였음이 분명하다. 나 같은 중년이라면 OST에만 귀를 기울여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음악 감독은 장기하였다. '싸구려 커피'에서 '부럽지가 않어'에 이르기까지 매번 실험적인 곡들을 선보이면서 두터운 골수팬 층을 거느리고 있는 뮤지션이다. 그가 곡을 직접 선택하고 일부는 연주까지 도맡았다고 한다. 이 영화가 음악 감독 데뷔작이라는데, 과연 그의 음악적 실험은 어디에서 멈출지 자못 궁금하다.
지난달 26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보름도 안 되어 손익분기점이라는 4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국내외 영화들을 멀찍이 따돌리고 독주하는 모습이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에다 '장기하다운' 음악까지 어우러져 감칠맛 나는 영화라는 입소문을 타고 있다. 어쨌든 감독이 들으면 조금은 서운할 영화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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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