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잉넛 <서커스 매직 유랑단> 앨범 이미지
KM Culture
'경록절'이라는 명절을 들어본 적 있나. 누군가는 '그게 뭔데?'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겠지만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단어일 것이다. 지난 주말 홍대 인근은 이 '경록절'의 열기로 오랜만에 떠들썩했을 것이고. '경록절'이라는 아주 신박한 가요계의 명절을 고안하고 이끄는 이는 그 이름에서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대한민국 밴드 크라잉넛의 멤버 한경록이다.
아니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최소한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정도의 성인은 돼야 자신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며 기념하는 것인데, 벌써 18여 년 너무나 떳떳하게 멤버의 생일을 기념해 한판 난장을 벌인다니 참 놀라운 밴드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그들의 음악을 듣거나 음악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게 되면 왜 이런 '자신감'이 생겨나게 됐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밖에 없지만.
오랜만의 대면 공연이라 이번에는 생일 하루만이 아닌 닷새 동안, 그것도 '마포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종합예술축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접하면서 왠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었다. 이는 대중가요와 홍대 인디 신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그들의 꺾이지 않는 열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노래 '서커스 매직 유랑단'에 얽힌 의외의 사건, 그러니까 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기상천외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는 2000년 초, 장소는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노래방으로 기억된다. 남편의 지인 부부들 몇과 함께 저녁을 먹고, 2차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당시만 해도 2차는 무조건 노래방이라는 공식이 있었기도 했고, 오랜만에 모인 자리라 일찍 파하기도 섭섭한 마음에 다들 흔쾌히 서로 부를 노래가 겹치지 않도록 순서를 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좀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편이 노래 부르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자타가 공인하는 '음치'에다 '박치'였기 때문에 사실 노래방 문화를 썩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피하는 편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쩌다가 그것도 할 수 없이 자신이 불러야 할 차례가 오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는데, 거기엔 그 어떠한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나마 노래가사를 화면으로 보지 않고 끝까지 부를 수 있던 노래는 딱 한 곡, 남진의 '님과 함께' 였으므로. 맞다,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시작하는 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겐 마치 국민가요 격인 그 노래 말이다.
이날도 지인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멋들어진 가창력과 함께 노래방을 장악할 동안 구석에 앉은 남편은 애꿎은 탬버린만 만지작만지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보, 이제 곧 당신 차롄데, 준비해야지. 오늘도 '님과 함께' 맞지?"
"아이다, 잠시만 기다리 봐라, 여기에 혹시 그 노래 있을라능가?"
너무나 뜻밖의 반응이었다. 남편이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가 '님과 함께'가 아니라니!
"뭔데? 무슨 노래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거, 크라잉넛 노랜데. 내가 제목을 잘 모르겠다. '매직 서커스'인가, 뭔가 그렇다. 좀 찾아 도!"
'세상에나, 남편이 크라잉넛을 안다고? 그리고 이 어려운 노래를 부르겠다고?' 마음의 소리는 그를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왠지 내 손은 그가 원하던 노래 '매직 서커스 뭐'가 아닌 '서커스 매직 유랑단'을 정확하게 찾아내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 후 그야말로 크라잉 랩을 하듯 첫 소절을 부르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전에 보지 못한 비장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