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인'
BIFF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고 만족할 만한 영화라고 말할 관객이 많지는 않을 듯하다. 영화는 전술하였듯, 영화의 문법과 맥락 안에서 대중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했고, 관객 또한 영화를 통해 특별한 경험을 하기를 여전히 대체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떠난 경험을 원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따라서 '삶의 자리'를 떠난 텍스트를 만드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 제작자들은 '삶의 자리'를 떠나 '영화의 자리'로 들어간다. 들어간 지 오래다. '삶의 자리'라는 말은 원래 신학에서 사용된 말이나, 여기선 <괴인> 같은 영화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차용되었다.
'삶의 자리'에서 '영화의 자리'로 옮아온 영화는 항상 더 특별한 자극과 더 참신한 구성을 요청받는다. 새로운 영화인은 선배들의 영화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술 분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상업적 추동 아래 놓인 영화산업의 숙명이기도 하다. 관객이 남다른 결말, 남다른 반전을 원함에 따라 '영화의 자리'는, 반도체가 그러하듯 집적도를 높이게 된다.
어렵사리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집적의 경쟁에서 아예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그룹이 말하자면 '삶의 자리' 영화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갔다가 디지털이 심화하자 아날로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듯 '삶의 자리' 영화는 반전 경쟁에서 반전 자체를 반전하는 도발을 감행한다. <괴인>이 말하자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독립영화 혹은 홍상수 류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 독립영화라는 말이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기에 독립영화보다는 선명하고 홍상수보다는 사회적 전망이 구체적인 게 <괴인>이자 <괴인> 같은 '삶의 자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
<괴인>이 강이라면 잔잔하게 흘러갔다. 격류가 없지만 수면 아래 상황은 다르다. 나는 이정홍 감독에게서 사회성이 버무려진 영화적 감성을 읽었다. 정색하지 않고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비판의식을 영화에 녹여버렸다. <괴인>은 얼핏 민물처럼 보이지만 소금이 잔뜩 녹아있는 짠 바닷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