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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임신, '벼룩시장'에서 방법 찾은 한 소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지금은 '엘리엇'이 된 엘런 페이지의 출세작 <주노>

22.04.26 11:25최종업데이트22.04.2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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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부터 시트콤과 예능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홍석천은 2000년 9월 자신이 동성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했다. 평소에도 중성적인 매력을 어필해 왔던 홍석천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예상한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세상의 눈초리는 생각보다 훨씬 따가웠다. 결국 홍석천은 출연하고 있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무려 10년 가까이 지상파 TV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출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활발하게 활동했던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는 '홍석천 사태(?)'이후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인기를 얻고 연예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홍석천과 하리수의 용기에 힘을 얻은 다른 성소수자 및 트랜스젠더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 중에서는 아직 홍석천, 하리수와 비견될 만큼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연예계보다 훨씬 개방적인 할리우드에서는 성소수자나 트랜스젠더 영화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시리즈로 유명한 워쇼스키 형제는 남매를 거쳐 지금은 자매가 됐고 대배우 조디 포스터도 지난 2013년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그리고 캐나다 출신 배우로 한때 할리우드의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엘런 페이지 역시 지난 2020년 '엘리엇'이라는 새이름과 함께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했다.
 
 2007년에 개봉한 제작비 700만 달러의 <주노>는 무려 제작비의 32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2007년에 개봉한 제작비 700만 달러의 <주노>는 무려 제작비의 32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미로비젼
 
성 정체성을 찾아간 할리우드의 국민 여동생

1987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페이지는 캐나다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다가 2005년 스릴러 영화 <하드 캔디>에서 소아 성도착증 살인범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주인공 소녀를 연기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는 벽을 뚫고 다니는 능력을 가진 키티 프라이드를 연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할리우드의 '국민 여동생'으로 만들어준 작품은 <하드 캔디>도 <엑스맨>도 아니었다.

페이지는 2007년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의 영화 <주노>에서 16세의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되는 소녀 주노 맥거프를 연기했다. 단 700만 달러의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주노>는 세계적으로 2억 31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당시 실제 나이로 스무 살을 갓 넘겼던 페이지는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할리우드의 '국민 여동생'으로 떠올랐다.

<주노> 이후 <아메리칸 크라임> <스마크 피플> <위핏>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한 페이지는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에서 꿈 속의 세계를 설계하는 건축학 대학원생 아리아드네를 연기했다. 페이지는 <인셉션>에서 마리옹 코티야르라는 프랑스 출신 배우와 함께 출연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3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라비 앙 로즈>와 <주노>를 통해 여우주연상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다.

2011년 우디 앨런 감독의 <투 로마 위드 러브>에 출연한 페이지는 2014년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통해 8년 만에 키티 프라이드로 컴백했다. 페이지는 액션과 멜로, 드라마, 코미디뿐 아니라 의외로 스릴러나 공포 영화에도 종종 출연해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로 유명하다. 2019년 넷플릭스 드라마 <엄브렐러 아카데미>에 출연한 페이지는 2020년 시즌2에 이어 오는 6월에 방송되는 시즌3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사실 페이지는 평범하고 심플한 커리어를 가진 배우가 아니다. 페이지는 무난한 배우생활을 이어가던 지난 2014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인권포럼 연설 도중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2018년에는 동성연인과 결혼했다가 작년 1월에 이혼했다. 페이지는 2020년 12월 SNS를 통해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하면서 이름을 엘리엇 페이지로 개명했다고 밝혔고 그렇게 '여성배우' 엘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흥행 2억 달러 영화가 국내에선 7만?
 
 아이 아빠인 블리커를 그저 친구로 생각했던 주노는 임신과정을 겪으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아이 아빠인 블리커를 그저 친구로 생각했던 주노는 임신과정을 겪으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미로비젼
 
무서운 살인마들이 등장하는 슬래셔 무비와 하드코어 록을 좋아하는 독특한 소녀 주노(엘런 페이지 분)는 16세의 어느 날 첫 경험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하고 친한 친구 블리커(마이클 세라 분)와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2달 후 주노는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아이를 낳고 기를 입장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주노는 아이를 지우려 했지만 아이의 심장이 뛰고 손톱까지 있다는 말에 차마 수술을 하지 못한다.

이에 주노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소중히 키워줄 불임부부를 찾기 시작했고 벼룩시장을 통해 근사한 집과 번듯한 직장, 출중한 외모를 두루 갖춘 바네사(제니퍼 가너 분)와 마크(제이슨 베이트먼 분) 부부를 찾아냈다. 이들 부부, 특히 그 중에서도 부인 바네사는 주노의 결정에 진심으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주노는 이런 마음을 가진 부부라면 아이를 줘도 되겠다고 104%(실제 주노가 영화 속에서 하는 표현) 확신한다.

주노는 직장생활로 바쁜 바네사 대신 집에서 작곡일을 하는 마크를 자주 찾아가 자신의 임신과정을 보고하지만 정작 마크는 주노의 배가 불러 올수록 자신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불안해한다. 하지만 임신과정을 통해 어른스러워진 주노는 아이 아빠인 블리커에게 뒤늦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바네사에게 "그래도 생각 있으시면 저도 그대로 할게요"라는 메시지를 남긴 후 자신이 힘들게 낳은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아이를 원했던 바네사에게 맡긴다.

사실 조금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양도(?)하는 주노의 행동이 철없고 이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했고 그로 인한 결과 역시 자신이 책임졌다. 비록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진 못했지만 주노는 세상 누구보다 엄마가 되길 원했던 바네사에게 아이를 맡기면서 주노만의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실현했다.

<주노>는 세계적으로 2억 31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히트작이지만 유독 국내에서는 전국관객 7만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이는 <주노>가 개봉하기 3년 전이었던 2005년 비슷한 소재의 한국 영화 <제니, 주노>가 개봉했었기 때문이다. 국내 관객들은 <주노>도 청소년들의 성관계와 미혼모 문제를 지나치게 가볍게 다뤘을 거라고 오해해 극장을 찾지 않았다.

주노 아버지가 <위플래쉬> 플레처 교수라고?
 
 주노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주던 아버지 맥(오른쪽)은 7년 후 <위플래쉬>에서 '폭군' 플레쳐 교수로 변신한다.
주노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주던 아버지 맥(오른쪽)은 7년 후 <위플래쉬>에서 '폭군' 플레쳐 교수로 변신한다.미로비젼
 
지난 2005년 벤 애플렉과 결혼해 슬하에 세 자녀를 낳고 2018년 이혼한 제니퍼 가너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꾸준히 사랑 받은 배우다. 가너는 2001년 드라마 <엘리어스>에서 주인공 시드니를 연기하며 새턴 어워즈와 미국 배우 조합상 TV부문 연기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마블 코믹스 원작영화의 '흑역사'로 꼽히는 2005년 개봉작 <엘렉트라> 역시 흥행실패와는 별개로 가너의 싱크로율은 흠잡을 데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너는 <주노>에서 결혼 후 5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벼룩시장에 입양을 원한다는 광고를 올려 임신한 주노와 만나게 되는 바네사 로링을 연기했다. 야근이 잦은 바네사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원하는 남편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본성은 매우 따뜻한 사람이다. 특히 영화 중반부 주노의 배를 만지며 아기에게 말을 거는 장면과 태어난 아이를 안으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을 때의 연기는 대단히 벅차고 사랑스럽다.

제작비는 단 700만 달러 밖에 들지 않았지만 <주노>에는 엘런 페이지와 제니퍼 가너 외에도 관객들에게 매우 익숙한 유명 배우가 한 명 더 등장한다. 바로 주노의 아버지 맥 맥너프를 연기한 배우 J.K.시몬스다. 맥은 16살짜리 어린 딸이 임신을 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후 말투가 다소 격양되지만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딸의 의견을 경청했고 바네사-마크 부부와의 상견례(?) 때 그들의 집에 함께 가주는 자상한 아버지다. 

주노의 아버지를 연기한 시몬스는 대학 시절 음악을 전공해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3편에 걸쳐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에서 데일리 뷰글의 편집장 J.조나 제임슨을 연기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영화 <위플래쉬>의 '폭군' 플레처 교수 역을 통해 국내 관객들로부터 '강마에는 애교'라는 평가를 들으며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를 비롯한 9개 영화제의 남우조연상을 쓸어 담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주노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 엘런 페이지 제니퍼 가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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