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태종 이방원>
KBS
이방원이 세자책봉 문제로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와 틀어진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태종 이방원>에서도 신덕왕후(예지원 분)와 이방원(주상욱 분)이 사이좋았던 시절을 다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으르렁대는 모습이 묘사됐다.
작은어머니 때문에 세자 자리를 놓친 이방원은 작은어머니 사망 2년 뒤인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인 이방번·이방석을 살해했다. 1400년에 왕이 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사망한 1408년 이후로 작은어머니에 대한 격하 운동에 착수했다. 1409년에는 도성 내에 있던 정릉(신덕왕후 무덤)을 파내서 이장시켰고, 거기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광교(광통교)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방원의 격하운동은 작은어머니가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었던 사실을 부정하는 방법으로도 나타났다. 음력으로 태종 16년 8월 21일자(양력 1416년 9월 12일자) <태종실록>에 나오는 이방원과 신하들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방원이 신하들에게 계모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새로 들어온 어머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 정릉(신덕왕후)은 내게 계모냐는 물음이 던져졌다. 신의왕후(이방원 친모)가 살아 계실 때 들어왔는데 어찌 계모일 수 있겠느냐는 답이 나왔다. 이방원을 만족게 하는 답변이었다.
이방원의 의도
이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아버지 사후에 이방원은 작은어머니가 어머니였던 사실을 부정하고자 했다. 작은어머니를 첩과 비슷하게 취급하려 했던 것이다. 조강지처가 있는 이성계와 혼인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정실부인이 된 신덕왕후를 그런 식으로 폄하했던 것이다. 신덕왕후를 아버지의 부인이 아닌 첩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방원이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신덕왕후의 친자인 이방석이 <태조실록>에서 서자로 지칭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죽고 5년 뒤인 1413년에 편찬됐다. 이방원이 왕일 때 편찬됐던 것이다. 신하들이 임의로 이방석을 서자로 지칭할 수는 없었다. 이방원의 의중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방원이 이미 죽은 작은어머니를 첩 비슷하게 취급하고 이미 죽은 이복동생을 서자로 취급하던 시절에 처첩분간과 서얼금고가 추진됐다. 이 시기에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복동생을 죽이고 후계자 지위를 빼앗은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고자 그렇게 했으리라는 추정할 수 있다. 적자인 이방원 자신이 서자 이방석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서얼금고법에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작은어머니와 이복동생에게 맺힌 한을 풀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으리라.
후대의 왕들 역시 이방원의 피를 물려받았으므로 이 같은 정치적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필요로 인해 조선시대의 서얼차별이 이전 시대보다 현저히 심각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얼금고법은 연산군·명종·선조·인조·숙종·정조 때 점차 완화됐다. 하지만 왕조 후기에 이르도록 제도가 남아 있었던 데는 이방석의 죽음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방원 이후 역대 왕들의 처지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일부다처와 축첩을 금한다는 명분 하에 서얼을 가혹하게 차별했다. 이 속에는 이방원의 권력 찬탈을 합법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대 정권들의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었다. 서얼금고는 그래서 지극히 정치적인 차별이었다. 정당한 이유를 결여한 차별이었던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