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 차별은 한국사 속의 중대 병폐 중 하나다. 어머니가 양인(자유인) 출신 첩이라는 이유로 서자들이 받은 차별, 어머니가 노비 출신 첩이라는 이유로 얼자들이 받은 차별은 한국 역사가 잉태한 주요 모순이다.
 
사실, 서자 차별과 얼자 차별을 통칭하는 서얼 차별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시대나 다 존재했다. 어떤 시대건 정실부인이 낳은 적자가 대우를 받았다. 적자보다 서자가 차별을 받고 서자보다 얼자가 차별을 받는 일은 각 시대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그 차별이 유독 심각했다. 서얼금고법이 있어 서얼의 혼인과 관직 진출에 제약을 가했다. 서얼의 과거 응시와 승진에 제약을 주고, 서얼이 적자와 혼인하지 못하도록 했다.
 
'서얼을 금고한다'에서 금고(禁錮)는 오늘날의 형벌인 금고형과 한자가 같다. 징역형과 달리 노역 없이 자유를 제약하는 금고형처럼, 서얼금고 역시 서얼들의 자유를 크게 제약했다.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서얼 차별이 조선시대에 유난히 심했다는 점은 고려시대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명확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서얼이 적자보다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시대만큼은 아니었다.
 
이 점은 KBS <태종 이방원>에 등장하는 정도전(이광기 분), 하륜(남성진 분), 조영규(김건 분) 등이 서얼의 피를 물려받은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고려 말의 정치적 격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어머니 쪽으로 서얼의 피를 받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정치적 활동에 별다른 제약을 주지는 않았다.

조선 건국 뒤 심해진 서얼 차별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KBS1
 
정도전의 경우에는 가장 친한 동지였던 정몽주가 그의 혈통을 문제 삼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된 뒤에 나타난 일이었다. 혈통이 관료 생활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은 그가 공민왕 시대에 과거시험을 거쳐 성균관박사를 지내고 보수파 집권기인 우왕 시대에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고려 말까지만 해도 두드러지지 않았던 서얼 차별이 조선 건국 뒤에 심각해진 데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일부다처나 축첩을 근절한다는 명분이 그것이다. 정실부인 자녀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을 서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차별을 가하게 되면 일부다처·축첩이 억제될 거라는 고려가 작용했다.
 
그런 명분하에 시행되기는 했지만, 이 제도는 첩의 아이들에게 불합리한 차별을 전가했다. 자기 어머니와 자기 아버지의 만남에 대해 아무런 작용도 끼칠 수 없었던 이들이 서자라는 이유로, 얼자라는 이유로 평생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한 서얼들의 불만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허균의 <홍길동전>이다. "길동이 점점 자라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기가 보통이 넘어 하나를 들으면 백을 깨달았다"는 구절 다음에 홍길동의 호부호형을 금지하는 아버지의 조치가 언급된다.
 
"공은 더욱 귀여워했지만 천한 어미 소생이어서 길동이 늘 아버지니 형이니 하고 부르면 그때마다 꾸짖고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길동이 열 살이 넘도록 감히 아버지와 형을 부르지 못하는 데다가 종들로부터도 천대받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한탄하면서 마음 둘 바를 몰랐다."

 
이래서 나온 것이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는 홍길동의 탄식이다. 소설 속 홍길동뿐 아니라 조선시대 서얼들도 대부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제도가 불합리했다는 점은 차별의 내용뿐 아니라 차별의 의도에도 있었다. 서얼금고법이 시행된 시점을 음미해보면, 이 속에 고약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와 첩을 법적으로 가르는 처첩분간의 기준이 마련된 것은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주인공이 임금으로 있을 때였다. 음력으로 태종 13년과 14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뒤 처첩의 자녀들을 차별하는 서얼금고법이 태종 15년에 제정됐다. 이때가 1415년이다.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KBS
 
이방원이 세자책봉 문제로 작은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와 틀어진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태종 이방원>에서도 신덕왕후(예지원 분)와 이방원(주상욱 분)이 사이좋았던 시절을 다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으르렁대는 모습이 묘사됐다.
 
작은어머니 때문에 세자 자리를 놓친 이방원은 작은어머니 사망 2년 뒤인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인 이방번·이방석을 살해했다. 1400년에 왕이 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사망한 1408년 이후로 작은어머니에 대한 격하 운동에 착수했다. 1409년에는 도성 내에 있던 정릉(신덕왕후 무덤)을 파내서 이장시켰고, 거기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광교(광통교)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방원의 격하운동은 작은어머니가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었던 사실을 부정하는 방법으로도 나타났다. 음력으로 태종 16년 8월 21일자(양력 1416년 9월 12일자) <태종실록>에 나오는 이방원과 신하들의 대화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방원이 신하들에게 계모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새로 들어온 어머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 정릉(신덕왕후)은 내게 계모냐는 물음이 던져졌다. 신의왕후(이방원 친모)가 살아 계실 때 들어왔는데 어찌 계모일 수 있겠느냐는 답이 나왔다. 이방원을 만족게 하는 답변이었다.
 
이방원의 의도

이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아버지 사후에 이방원은 작은어머니가 어머니였던 사실을 부정하고자 했다. 작은어머니를 첩과 비슷하게 취급하려 했던 것이다. 조강지처가 있는 이성계와 혼인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정실부인이 된 신덕왕후를 그런 식으로 폄하했던 것이다. 신덕왕후를 아버지의 부인이 아닌 첩으로 격하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방원이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신덕왕후의 친자인 이방석이 <태조실록>에서 서자로 지칭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태조실록>은 이성계가 죽고 5년 뒤인 1413년에 편찬됐다. 이방원이 왕일 때 편찬됐던 것이다. 신하들이 임의로 이방석을 서자로 지칭할 수는 없었다. 이방원의 의중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방원이 이미 죽은 작은어머니를 첩 비슷하게 취급하고 이미 죽은 이복동생을 서자로 취급하던 시절에 처첩분간과 서얼금고가 추진됐다. 이 시기에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복동생을 죽이고 후계자 지위를 빼앗은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고자 그렇게 했으리라는 추정할 수 있다. 적자인 이방원 자신이 서자 이방석을 죽이고 왕이 된 것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서얼금고법에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작은어머니와 이복동생에게 맺힌 한을 풀려는 의도도 없지 않았으리라. 
 
후대의 왕들 역시 이방원의 피를 물려받았으므로 이 같은 정치적 의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필요로 인해 조선시대의 서얼차별이 이전 시대보다 현저히 심각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얼금고법은 연산군·명종·선조·인조·숙종·정조 때 점차 완화됐다. 하지만 왕조 후기에 이르도록 제도가 남아 있었던 데는 이방석의 죽음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방원 이후 역대 왕들의 처지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일부다처와 축첩을 금한다는 명분 하에 서얼을 가혹하게 차별했다. 이 속에는 이방원의 권력 찬탈을 합법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역대 정권들의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었다. 서얼금고는 그래서 지극히 정치적인 차별이었다. 정당한 이유를 결여한 차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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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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