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샷: 데틀레프 로베더 신탁청장의 모습
넷플릭스
동독사회의 반발이 극심해질 무렵, 강심장이었던 로베더는 마침내 사임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서독의 재무장관과 총리는 로베더의 사임을 수락하지 않았다.서독 정부관료들은 서방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경쟁구도에 비추어볼 때 동독 공산주의 경제구조의 취약성을 뜯어고치려면 시작된 구조조정을 멈추어선 안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로베더는 사임의사를 철회하였다. 그때로부터 불과 석 달 뒤, 그는 살해되었다.
로베더 암살사건의 범인으로, 당대에 세 개의 조직이 언급되었다. 적군파3세대, 해체된 구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혹은 서독의 막강 정치세력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사건 당시 수사팀의 수사방향으로 채택되었으며 둘 다 동독인들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조직 중 어느 쪽도 확실히 진범으로 확정할 수 없었다. 심증도 있고 물증도 적당히 들어맞는 것 같아 보였지만, 결정적인 게 나오지 않았다.
첫 번째 용의자인 적군파3세대의 경우, 현장에서 적군파3세대의 범행 자백서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지만 적군파의 논조가 아니라는 점이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비교적 느슨한 조직체인 적군파 치고는 암살 자체가 너무나 주도면밀한 점도 수상쩍었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적군파 조직원의 머리카락 DNA를 추적해 범인을 밝혀냈으나 체포과정에서 그가 자살해버린 데다, 웬일인지 그 여파로 열 명 남짓한 고위관료들이 사임하거나 해임되는 기현상이 일어나면서 적군파3세대가 범인이라는 주장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설'이다.
두 번째 용의자는 슈타지인데, 슈타지가 조직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로베더를 암살했을 경우 그들 조직에 이익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물론 과거 슈타지였던 한 남성은, 슈타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통일 후 실직자가 되어 여타의 동독인들처럼 개인적으로 큰 분노를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슈타지가 조직 차원에서(이익은커녕 테러조직으로 지탄받게 될 게 뻔한 상황에서) 로베더를 암살한다? 그것은 간단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또한 또하나의 '가설'로 취급되었다.
그리하여, 누가 실제로 총을 발사했든지간에 범행을 주도한 배후가 서독의 막강 정치세력일 수 있다는 가설과 의심만 남는다. 사건 당시 수사팀이 그쪽으로 수사방향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뿐 아니다. 어쩐 일인지 그쪽으로 수사방향이 진전될 만할 때쯤에는 뜻하지 않게 돌발사건이 일어나, 수사 자체가 좌절되곤 했다.
로베더 암살에 대한 수사 진행은 몹시 더뎠지만 베를린 신탁청의 새 청장 임명은 매우 빨랐다. 신임 신탁청장은 협의 및 구조조정에 치중하며 동독사회와 타협하려 했던 로베더와 달랐다. 아예 노골적으로 시장경제체제로의 강력한 이행을 진행하였다. 동독의 회사 94%가 삽시간에 서독이나 다른 나라에게 헐값에 팔려나갔다. 그럼으로써 동독의 기업은 대부분 민영화되었다. 로베더 암살사건으로 이득을 본 건 적군파도 아니었고, 슈타지도 아니었다. 오직 서독 정부만이 이득(동독의 자본주의화에 속도를 냄)을 보았다.
동독인들은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기네들이 또다시 서독 식의 개혁을 반대하면 누가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불안감을 느꼈던 듯하다. 월요시위도 중단되었다. 하여, 서독 정부는 방해 없이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로베더 암살사건>은 범인을 단정하지 않는다. 모두 가설인 채로 놓아둔다. 어쩌면, 적군파든 슈타지든 동독의 누군가가 로베더를 죽였을 수 있다. 그게 뜻밖의 '나비효과'를 일으켜 가만히 있던 서독 정부가 이득을 얻게 된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득을 보기 위해 서독 정부가 처음부터 나섰을 가능성은 없을까? '동독 경제붕괴 직전에 통일이 된 것'이라는 판단 하에 동독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해체를 관철하고자 했던 서독 정부가 내내 팔짱끼고 가만히 있다가 그저 부대이익을 손에 넣은 것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