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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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보쌈 사실이 발각되면 그 정도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점이다.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바우와 춘배는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보쌈 일을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약탈혼으로 규정되는 그 같은 보쌈 풍습은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 750~1258)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천일야화>에도 등장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로도 불리는 이 책에는 약탈혼을 당해 25년간 지하궁전에 감금된 여성이 등장한다. '흑단의 섬'으로 불리는 왕국에서 공주로 태어났다가 보쌈을 당한 이 여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부왕께서는 저와 사촌이었던 왕자를 제 배우자로 선택해주셨습니다. 신혼 첫날밤, 궁정과 '흑단의 섬' 수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었고 신부인 저는 신랑에게 인도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정령이 나타나 저를 납치해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기절하여 의식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 지하궁전에 잡혀와 있었지요. 처음에 저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그 흉측한 정령과 함께 사는 것도 견딜 만하게 되더라고요."
정령이 공주를 보쌈했다는 내용의 비현실적인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보쌈을 통한 약탈혼 풍습이 아바스 왕조 치하의 이슬람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기에 이것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쌈 풍습은 현대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현대 세계에서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40여 국가를 여행하다가 2000년경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접한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한 전상중씨가 <샘터> 2005년 7월호에 기고한 '[해외통신] 사랑한다면 납치해줘 - 키르기스스탄 유목민의 보쌈 결혼'에 이런 대목이 있다.
"키르키즈어로 '알라 카추(여자를 훔쳐라)' 즉 납치혼 또는 약탈혼으로도 불리는 이 결혼 풍습은 12세기 유목민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소련 때부터 법으로는 금지돼 있지만, 대부분의 키르키스인들은 이런 행위를 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처벌되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보쌈은 '강제연행'보다는 '유인' 형식으로 많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부분 '잠깐 차나 마시며 얘기 좀 나누자' 또는 '파티에 가자'고 유인하는 방식으로 보쌈해 간다"고 위 글은 말한다.
방식 역시 과거와 현저히 다르다고 한다. "과거에는 흰색의 큰 자루에 여자를 넣거나 유목민답게 말에 태워 보쌈을 했지만, 요즘은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여 납치한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보쌈 - 운명을 훔치다>도 그렇고 <하멜 표류기>도 그렇고 <천일화야>도 그렇고 전상중 기고문도 그렇고, 보쌈을 다룬 글이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 여성을 납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었다.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남성을 보쌈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객지를 여행하는 남성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일들이 있었다. 특히,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한양을 방문한 선비들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과거시험 시즌이 되면 수험생들뿐 아니라 바우나 춘배 같은 보쌈꾼들도 덩달아 바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보쌈에 대한 공포심이 지방 수험생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존재했다고 한다.
2019년에 <비교민속학> 제69집에 실린 민속학자 이영수의 논문 '보쌈 구전설화 연구'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1926년의 일본어 논문인 '조선 원시 제민족의 혼인(朝鮮原始諸民族の婚姻)'을 근거로 하는 설명이다.
"과거가 시행되면 지방에서 많은 미혼의 양반 자제들이 서울로 모여들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총각보쌈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점복자에게 점을 치고, 만약 보쌈과 같은 것에 걸릴 점괘라도 나오면 상경을 단념하였다고 한다."
총각보쌈의 목적 중 하나는 처녀의 액운을 막는 데 있었다. 과부가 될 팔자라는 점괘를 받은 처녀의 부모들이 이런 일을 자행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 일을 막고자 낯선 총각을 보쌈해 모의결혼을 시킴으로써, 미래의 진짜 사위가 받게 될 '일찍 죽을 운명'을 낯선 총각에게 떠넘기기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두면 처녀가 진짜로 결혼할 신랑이 일찍 죽지 않게 되리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과부 보쌈이나 처녀 보쌈은 과부나 처녀와 결혼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총각 보쌈은 총각과 결혼할 목적뿐 아니라 총각을 죽일 목적으로도 이루어졌다. 보쌈은 주로 여성을 상대로 일어났지만, 이것이 남성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훨씬 심각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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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