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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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이 아니라 사랑
불륜이 사랑이냐 아니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불륜은 일부일처제란 제도적 강제와 통념에서 벗어난 애정관계를 지칭하며, 미시적으로는 사인(私人) 간의 약속 위반을 뜻한다. 따라서 불륜은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동성애 또한 그렇다.
동성애는 질병이기 때문에 병을 고치면 되지, 그것이 일부일처제의 근간을 흔들 제도적 위협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에 그들이 '관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캐롤은 병이 든 것이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인식이다. 남성의 혼외정사는 문제삼지 않는 가부장제는 주로 여성의 혼외정사를 단죄하는데, 영화 <캐롤>에서 보듯 1950년대 미국에서 여성 사이의 정사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단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캐롤에게는 예일대 출신 의사의 값비싼 치료가 제공된다. 병든 여인을 버리지 않고 가정으로 되돌리는 자애로운 치유의 풍경이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적합성을 갖는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현재에 이르는 아주 짧은 기간에 존속하고 있는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는 부계 혈통이 검증되는 '번식'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포유류인 인간에게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모계가 언제나 자동으로 확증되기에 부계 번식의 확보는 일부일처제와 '불륜'의 배제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번식이 개입하지 않은 사랑인 동성애는 애초에 일부일처제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 '관대'할 수 있는 이유인 셈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제도에 국한하고 개인의 감정에서는 전혀 다른 파문을 일으키곤 한다.
극중 캐롤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음에도 잠시 가정으로 돌아간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고 캐롤의 시가에서 그를 받아 준 주요한 이유 또한 아이 때문이었겠지만, 캐롤은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나 딸에게나 좋지 않다고 자각하고 마침내 가정을 떠나 독립한다. 그러곤 테레즈를 찾아가 사랑을 회복한다. 가부장제 질서를 뒤흔드는, 공인받지 못한 여러 사랑의 경로에서 동성애는 상황에 따라 더 쉬운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는데 영화 <캐롤>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예외 상황이, 일부일처제·가부장제와 다른 제도적 억압이 결부되어 함께 작동하는 동성애에 대한 전면적 혐오를 무화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모든 걸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을 표방한 영화 <캐롤>의 백미가 마지막 장면이라는 데에 대체로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확신과 불안의 교차를 감당하며 우아함으로 기다림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드디어 기대한 기다림이 실현되었을 때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케이트 블란쳇이란 배우의 연기가 빛을 발한 순간이다.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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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미술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나이 들어 신학을 공부했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