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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사랑한 아내를 보내준 유명 가수, 이유는

[김성호의 씨네만세 247] 영화 <레토> 마이크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

19.01.22 15:49최종업데이트19.01.2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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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토> 포스터.
영화 <레토> 포스터.(주)엣나인필름
 
이를 수 없는 무엇을 동경하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것, 그것은 용기 있는 일이다. <레토>는 바로 그 용기에 대한 영화다.

<레토>를 본 많은 이들이 빅토르 최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려인 출신으로 구 소비에트 연방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룬 가수 빅토르 최의 삶을 다룬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한국계 배우 유태오가 그를 연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머리에 동양인 외양을 가진 빅토르는 이 흑백의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인물이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첫 등장 신에서조차 환하게 빛을 발하는데 그 빛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이전까지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유명가수 마이크(로만 빌릭 분)다.

날 좋은 어느 날 동료들과 찾은 바닷가에서 마이크는 빅토르를 만난다. 레닌그라드에서 제일가는 가수 마이크를 만나러 기타 하나 달랑 맨 빅토르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함께 온 친구와 함께 마이크에게 자신이 쓴 미완성곡을 들려준다. 그리고 마이크는 그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빅토르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드디어 진짜가 나타난 것이다.

마이크는 빅토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배가 된다. 그 자신이 좋아하는 서구의 곡, 예를 들어 벨벳언더그라운드와 루 리드, 그밖에 수많은 음악가의 곡을 들려주고 설 무대를 제공하는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빅토르는 자연스레 마이크의 삶 가운데 들어와 그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그 가운데는 마이크의 아내이자 뮤즈인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분)가 있다.

제가 사랑할 것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영화 <레토>의 한 장면. 남편과 빅토르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분).
영화 <레토>의 한 장면. 남편과 빅토르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분).(주)엣나인필름
  
빅토르를 만나고 그에 대해 알아가며 나타샤는 새로운 감정과 마주한다.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빅토르에게서 남편 마이크에게선 찾을 수 없는 매력을 느낀 것이다. 남몰래 감정을 키워가던 나타샤는 마침내 마이크 앞에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마이크는 그 앞에서 절망하며 한 걸음 물러서길 선택한다.

아내와 빅토르가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뒤 빗속에서 괴로워하는 마이크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연출 가운데 영화는 이 장면을 루 리드의 명곡 'Perfect Day'와 함께 잡아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내에게 자신의 모든 걸 내주는 이 어리석은 인간을 보며 적잖은 관객이 안쓰럽고 답답한 감정을 가졌으리라.

이쯤 되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유명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갑자기 나타난 천재와 그를 동경하며 질시한 다른 사내의 이야기.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스스로 천재가 이룩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는 그 자신을 파괴해버리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레토>의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이 영화를 결코 그런 흔해빠진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다. 여름을 두려워 않고 꽃을 피우는 봄날의 식물처럼, 제가 사랑할 것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용감한 인간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두꺼비라 조롱받던 사내가 늪을 넘어 온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
 
 영화 <레토>의 한 장면. 말 없고 무표정해 오만하게까지 보이던 마이크(로만 빌릭 분)의 선글라스 뒤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있었던 게 아닐까.
영화 <레토>의 한 장면. 말 없고 무표정해 오만하게까지 보이던 마이크(로만 빌릭 분)의 선글라스 뒤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있었던 게 아닐까.(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마이크가 빅토르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서구세계를 동경해왔다는 사실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일례로 마이크는 소련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커피를 좋아하고, 미국과 영국의 음악을 녹음해 집에서 들으며, 그 경향을 자신의 곡에 반영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마이크가 자유주의 세계와 체제 경쟁을 하던 당대 소련의 유명가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이색적이다.

더욱 놀라운 건 마이크에게 서구의 음악이 경쟁이 아닌 동경의 대상에 가깝단 점이다. 극중 마이크는 음반을 녹음해 서구 세계로 내보내자는 동료의 제안에 비틀즈·밥 딜런·롤링스톤즈·퀸·벨벳언더그라운드 등 수많은 음악가들을 열거해가며, 이미 서구세계엔 제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토해내듯 고백한다. '왕처럼 행세할 수 있다면 작은 늪의 두꺼비도 나쁘지 않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루 리드와 벨벳언더그라운드를 쫓던 저 자신의 한계를 마이크는 빅토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이크 앞에 빅토르가 나타난다. 서구의 유명 가수를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 저만의 스타일로 자신 있게 제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서 마이크는 무엇을 보았을까. 마이크가 빅토르에게 당대 소련에선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자극을 전하려 한 건, 또 그와 아내 사이의 일을 애써 눈감으려 했던 것 모두 빅토르가 마이크에게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레토>의 진정한 매력은 마이크를 그저 서구세계를 동경하는 두꺼비 정도로 남겨두지 않았단 점에 있다. 영화는 마이크가 빅토르나 서구의 가수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하는 대신 계속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며 제 음악을 해나가길 선택했다는 걸 보여준다. 마이크는 가장 화가 나는 순간에서조차 나타샤와 빅토르를 탓하지 않고 지난 계절 뒤에 새 계절이 덮이듯 달갑지 만은 않은 변화를 묵묵히 감내한다. 저를 추월하는 자와 제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선 자를 저주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의 오늘을 감당하는 것이다.

봄이 지나면 레토가 온다
 
 영화 <레토>의 한 장면.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빅토르 최 역에 캐스팅된 유태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 <레토>의 한 장면.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빅토르 최 역에 캐스팅된 유태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주)엣나인필름
  
간절히 원했으나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이가 가져가는 걸 보며 의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제가 갖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질 때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묵묵히 해내는 건 어렵긴 해도 가능한 일이다. 이 영화는 빅토르와 자유세계의 음악을 대하는 마이크의 자세로부터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을 긍정해내는 용기를 보여준다. 저를 추월하는 자와 제가 이를 수 없는 곳에 도착해 있는 이를 상관하지 않고서,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내는 용기 말이다. 우리는 그걸 자긍심이라 부른다.

해체 이전 소련에서 살아간 음악가의 이야기를 다뤘음에도 <레토>가 당대 소련의 음악 대신 같은 시기를 산 미국과 영국 음악가의 곡을 활용한 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음악뿐 아니라 할리우드가 이룩한 영화 연출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련과 러시아의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의 선택 역시 그렇다. 어쩌면 미국의 팝음악을 동경하던 마이크로부터 할리우드의 방식으로 구 소련의 이야기를 펼쳐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을 읽어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마이크와 같은 자긍심이 없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선택을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감독 스스로가 극중 마이크가 그랬듯 자유세계의 영화와 음악을 동경했고 그를 활용해 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닐는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구금당한 감독의 모습이 곡과 무대, 복식과 태도까지 모든 걸 검열당한 1980년대 소련의 가수들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순간에서조차 제 방식으로 사랑하길 선택했던 사내, 화려한 여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봄이고자 했던 마이크의 삶이 곧 감독이 <레토>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지라도 봄이 지나면 여름(레토)는 오고야 말기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레토 (주)엣나인필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로만 빌릭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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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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