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정몽주 동상.
김종성
조선 유학자들의 사표로 추앙되던 포은 정몽주의 문학작품에서도 그런 정서가 표출된다. 고려 멸망 12년 전인 1380년에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오다가 전라도 전주에서 창작한 시를 보면, 정몽주의 머릿속에서도 공자·맹자 못지않게 신선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느낄 수 있다.
1380년 어느 날 저녁 무렵에 지은 <전주 망경대에 오르다>에서, 그는 방금 전에 사라진 태양빛을 그리워하며 "하늘가에 지는 해가 뜬구름에 묻혀 버리자, 서글프게도 옥경(玉京)을 바라볼 수 없게 됐네"라고 노래했다. 시 속의 '옥경'은 고려 임금이 사는 개경을 상징하지만, 신선세계의 도읍인 옥경을 개경에 빗댔다는 것은 의식 속에서 그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유교 선비뿐 아니라 불교 승려들 중에도, 깨달음의 경지보다는 장생불사의 경지를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임방(1640~1724년)이 시인과 시에 얽힌 이야기들을 정리한 <수촌만록>에는 1600년대 중반에 태어난 도영이란 불교 승려가, 백세에 가깝도록 동안 피부를 유지하면서 곡식도 먹지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으며 수행에 정진한 이야기를 소개한 뒤 "몇 십년 뒤에 들으니 도영은 이미 신선이 되어 갔다는 것이었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
유교는 종교적 색채가 옅은 이념체계다. 공자·맹자가 가르친 사상은 오늘날로 치면 종교학이나 철학보다는 정치학 혹은 윤리학에 가깝다. 당시에는 학문 분화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학문이 죄다 종교나 철학으로 간주됐다. 공·맹이 오늘날 출현했다면, 그들의 학문은 분명히 정치학이나 윤리학에 포함됐을 것이다.
종교적 색채가 엷다 보니, 유교는 인간의 근원적 고민에 대한 해답을 주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하루하루 늙어가는 자신을 서글퍼하면서 살아간다. 20대 중반만 넘어도, 나이 들어가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고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하는 문제 이상으로, 우리 대부분은 우리 피부와 신체가 어떻게 바뀌어 가는가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산다.
정몽주 시집에서도, 하루하루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서글퍼하는 감정이 매우 자주 드러난다. 이처럼 유학자들도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유교에서는 해답을 주지 않으니, 그들 역시 장생불사하는 신선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신선세계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면서도, 사적 영역에서는 공자님·맹자님보다 신선들을 더 많이 동경하고 그에 대한 시를 남기곤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청자들이 <계룡선녀전>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선녀나 신선들을 별 거부감 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머릿속에서도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의식 역시 인간 공통의 고민인 생로병사와 인간 공통의 꿈인 장생불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