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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의 단어, '재일조선인'의 쓰임을 살펴보자. 류승완 감독은 많은 자료와 고증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7월 20일 VIP 시사회 때 그는 무대에 서서 객석의 한 일본인을 소개하였다. 소개하기를 '재일조선인'을 위해서 긴 세월 동안 시민운동을 해 오신 분이라고 시바타 토시아키 씨를 가장 먼저 소개하였다. 재일교포,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한인, 재일코리안, 재일, 자이니치라는 다양한 명칭을 두고 '재일조선인'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이 식민시기에 차별, 박해 당했으니, 당연히 그들을 '재일조선인'이라고 칭해야 하겠지만, '동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사라진 것처럼 '재일조선인'들을 '재일조선인'들이라고 호명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 예들은 시바타 토시아키 씨가 나온 방송프로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정식 직함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이지만 KBS <역사스폐셜: 지옥의 땅, <군함도> (2015.6.28.), JTBC <이규현의 스포트라이트>(2015.10.30)에서 전부 향토사학자로 소개된다. 그의 정식명칭은 <다이빙벨>(2014)을 찍은 안해룡 감독이 찍은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2015)에서 비로소 제대로 소개된다.
인터넷에는 <군함도>를 보느니 차라리 <무한도전>을 다시 한 번 보라는 말도 떠돈다. 하지만 <무한도전> 방송에서도 오류는 있었다. 예컨대 자료로 이용한 레스토랑 사진은 조선인 강제 동원의 실상을 부인하는 '군함도자료관'에 전시된 이미지로 실제로는 1965년경 사진이다. 이때는 광복 후로 조선인 강제 동원이 없던 시대였지만, <무한도전> 제작팀은 강제 노동과 대비되는 극적 효과를 위해 이 이미지를 사용하였을 터이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당시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하는데, 군함도가 한 때 경제적으로 윤택해서 1957년에 7.8%가 흑백 텔레비젼을 시청한 것은 사실이나, 1960년대 이후에야 일본에서 컬러 방송이 실시되었음이 무시됐다.
이런 점들을 놔두고 <군함도>를 '국뽕' 혹은 애국심 팔이라고 조롱해도 되는가.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한 촛불 모임도 류승완 감독은 사실(史實)에 입각했다. 1945년 당시 일본인들은 공습을 두려워하여, 우리가 1970년대 후반까지 실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야간관제 훈련처럼 창문에는 천막을 치고, 촛불이나 석유램프로 겨우 어둠을 밝혔다. 7월 31일 당시 다카시마는 폭격을 받아 정전이 되고, 하시마는 비상용 전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가정용으로는 보급되지 않았다. 촛불로 어둠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류승완 감독이 촛불 집회를 의식하지 않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이 신 자체가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대탈출 신을 연출한다. 이는 한 개인의 탈출이 아니다. 한 장애인이 자신의 몸을 던져 무서워하던 여인네를 이끌며 다함께 탈출할 것을 독려한다. 집단 탈출로 해방구를 모색한다. 지난 겨울을 떠올려 보자. 한 개인들이 몇 백만이 되어 촛불을 나누며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의 결기는 어땠는가. '나'가 아닌 '우리'는 결국 해방구를 찾았다. '우리'였기에 더욱 신이 났고 흥이 났으며 더 모여들었다. <군함도>에 흥이 더욱 더해졌다면, 관객들의 호응은 더하였을 것이다. 류승완 감독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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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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