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향수병에 시달리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와 그녀가 만난 따뜻한 남자 토니(에모리 코헨 분).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브루클린>이 에일리스를 주인공 삼아 펼치는 이야기는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다. 여느 시골 소녀가 도시에 유학 와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그를 극복하기까지의 여정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젊은 처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사랑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아일랜드와 미국, 대서양을 가로지른 갈팡질팡의 삼각관계는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 <브루클린>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에일리스에 앞서 미국에 정착해 산업역군으로 활약했을, 하지만 현재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이 든 이민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장면에선 더욱 그렇다. 새로운 나라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고층빌딩을 세우고 다리를 놓고 댐을 건설하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이들, 하지만 반평생을 낯선 땅에서 분투하고 난 뒤 남은 건 어제와 같은 오늘뿐이다. 저기 고향 땅에선 젊고 영리한 뒷세대들조차 여객선에 몸을 싣지만 브루클린엔 아일랜드가 아닌 미국만이 자리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떠나온 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녹색 옷을 벗고 점차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는 에일리스,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일랜드 남자 대신 이탈리아계 이민자를 선택하는 그녀. 영화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나가는 한 인간의 드라마를 넘어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일랜드인이 미국 사회에 편입됐던 가슴 아픈 광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선배세대의 노고를 잊지 않음은 물론이다.
여러모로 <브루클린>은 아일랜드판 <국제시장>이라 할 만하다. 선배세대가 살아간 시대와 그들의 수고로움을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두 영화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윤제균 감독이 선배세대의 지나간 삶을 매우 극적이고 노골적이며 과장된 시선에서 그려낸 것과 달리 존 크로울리는 그 시대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 전체의 이야기를 에일리스의 신세계 적응기와 맞물려 담담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한다. (참고 :
'국제시장', 우리를 이렇게 기억해도 괜찮은 걸까)
덕분에 영화는 그 시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아일랜드인은 물론, 바다 건너 다른 문화권 관객에게까지 호소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존중할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