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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된 사내의 아픔, 때론 신도 실수한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115] <대니쉬 걸>

16.03.04 10:54최종업데이트16.03.0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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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쉬 걸 포스터
대니쉬 걸포스터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때로는 신도 실수를 하는가. 그 실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에디 레드메인은 축복받은 배우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에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이 됐다는 것부터 출연하는 작품마다 유력 평론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점이 모두 그렇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영화팬 대다수가 그 얼굴조차 몰랐던 82년생 젊은이는 거짓말처럼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마이클 키튼, 스티븐 카렐, 베네딕트 컴버배치, 브래들리 쿠퍼,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까지. 모두 그가 제친 배우들이다. 전통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이 실제인물이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게 호의적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스티븐 호킹 박사의 실화를 다룬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수상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로 1년. 에디 레드메인은 오스카 수상에 안주하지 않았다. 스티븐 호킹에 이어 덴마크 출신의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가 또 다른 목표가 됐다.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다 수차례 성전환수술을 받고 그 부작용으로 사망한 에이나르 베게너, 즉 릴리 엘베(에이나르 베게너의 여성으로서의 이름)를 연기하게 된 것이다. 루게릭병(근위축 증)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서도 사랑과 과학에 대한 열망을 간직했던 스티븐 호킹에 이어 남성의 육체를 갖고 태어났으나 온전한 여성이 되기를 갈망했던 릴리 엘베는 그에게 충분한 도전이 됐다. 결핍 가운데서 갖는 열망이란 대체 얼마만큼 절절한 것인가.

에이나르 베게너로 태어나 릴리 엘베로 살기를 꿈꾸다

대니쉬 걸 고향에 펼쳐져 있던 늪지대 풍경을, 가슴 아래 가라앉은 어둠을, 거듭해서 그렸던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 분)
대니쉬 걸고향에 펼쳐져 있던 늪지대 풍경을, 가슴 아래 가라앉은 어둠을, 거듭해서 그렸던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 분)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대니쉬 걸>은 에이나르 베게너로 태어나 릴리 엘베가 되기를 꿈꾼 한 인간의 이야기다. 동시에 아내로서 그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며 깊은 고통을 받은 게르다 베게너의 이야기다.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꿈에 다가서려는 불굴의 욕망을 그렸으며 참담한 아픔 속에서도 애인을 지키려는 한 여자의 용기를 그렸다.

촉망받는 덴마크의 풍경화가 에이나르와 무명의 인물화가 게르다는 금슬 좋은 부부다. 게르다가 에이나르 만큼 주목받는 화가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들 사이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모든 건 게르다가 에이나르의 내면에 잠든 '릴리'를 깨우며 시작됐다. 모델의 잦은 지각에 조급해진 그녀가 남편을 모델 삼아 발레슈즈와 스타킹을 착용하게 하고 급기야는 발레복을 몸에 대도록 했는데 그것이 에이나르의 내면에 잠재된 본성을 자극하고만 것이다. 소년 시절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으나 이후 십 수 년 동안 그에 대한 기억을 잊고 살아온 에이나르에게 이후의 삶은 더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영화는 릴리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에이나르와 그런 그녀의 앞에 펼쳐진 낯설고 폭력적인 세상, 남편과 자신을 지키려는 게르다의 분투를 한꺼번에 비춘다. '왜 여성인 나는 남성으로 태어났는가', '어째서 나의 정신은 잘못된 육체에 매여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거듭 릴리를 괴롭힌다. 그녀는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고 여성의 성기를 제 몸에 갖기를 원하며 마침내는 임신까지 할 수 있는 온전한 여성이 되기를 꿈꾼다. 온전한 여성의 육체를 갖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고자 쉽지 않은 걸음을 떼는 그녀의 모습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향해 전진하는 불굴의 의지가 읽힌다.

투박한 연출, 비범한 연기

대니쉬 걸 가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릴리'가 깨어나는 순간
대니쉬 걸가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릴리'가 깨어나는 순간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릴리의 욕구만큼이나 에이나르를 사랑하는 게르다의 선택 역시 절절하다. 사랑하는 에이나르를 놓아줄 수 없지만 그가 릴리로 살 때만이 행복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곁에 잡아두어도 꾸준히 멀어져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끝없는 상실감에 고통 받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슬프고 공허하게 만든다.

톰 후퍼의 연출은 좋게 말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투박하기 짝이 없다. 그가 그려낸 이야기는 좀처럼 상투적인 퀴어물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다른 성을 갖기 위해 싸워나가는 주인공과 그런 그를 지켜보며 고통 받는 주변인물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아니고서도 수없이 많은데 영화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또 한 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품은 미덕의 대부분은 비범한 배우들로부터 비롯된다.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에디 레드메인이란 야심찬 두 배우는 이미 고평가되고 있긴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렬함을 영화에 아로새겼다. 에디 레드메인은 온전한 여성이 되길 꿈꿨지만 끝내 여자가 되지 못한 소녀의 비극을 그의 육체를 캔버스 삼아 표현해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관객의 공감을 사는 연기로 영화의 비애감을 극대화했다. 만일 이들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영화는 결코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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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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