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성두섭하동욱 역을 맡은 배우 성두섭이 지난 31일, 음악극 <유럽블로그>의 커튼콜에서 노래하고 있다. 하동욱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를 다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며 유럽을 찾는다.
곽우신
그러나 극을 본 뒤엔 왜인지 모를 찝찝함이 남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어떤 세대도, 어떤 계층도 팍팍한 삶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유럽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동욱도 유석호도, 모두 유럽 여행을 당장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 사람은 대기업에 입사 후 풍족한 월급을 받아 착실히 모았고, 다른 이는 동대문 상인으로서 꽤나 돈을 만지는 사람이다.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모으고, 취업준비를 위해 오늘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야 하는 게 지금의 대학생이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너희는 낭만이 없어", "강의실 밖으로 낭만을 찾으러 떠나라"는 말이 얼마나 유의미하겠는가. 직장인도 마찬가지이다. 업무에 치이면서도 생존을 위해 또 스펙을 쌓아야 한다. 이들에게 "너는 왜 기계처럼 살고 있느냐", "너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라"는 말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극 중 인물들은 평범한 우리네 인생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니 관객으로서 캐릭터에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그저 환상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부유한 데다 재치도 넘치는 남자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환상적인 배우들이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럽에 대한 환상만 부풀린다. 관객은 그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꿈을 캐릭터에 투영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데 그칠 뿐이다.
감정이입이 안 되니, 온종일을 만나고 변화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이번 <유럽블로그>는 애초부터 초연에 비해 이야기의 중량감이 떨어진 채 각색됐다. 여기에 그저 그런 '해피엔딩' 마무리가, 이전까지 스토리가 쥐고 있던 위로의 메시지를 공허하게 흩어버린다. 유쾌하지만, 극이 끝남과 동시에 그 유쾌함은 금세 휘발된다.
극은 스스로에게,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쾌함이 휘발된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자신만의 여행을 해라"라는 온종일의 조언에, 하동욱과 유석호는 무언가 크게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게 여행, 다시 찾을 수 있을거야. 그게 인생, 잃어버렸던 길에서이게 여행,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게 인생, 다시 찾을 수 있을까."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던 하동욱은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산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도 아니고, 새로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 자리에 그대로 돌아간다. 예정된 결혼을 하고, 아내가 해주는 3분 카레에 울상을 지을 뿐이다. 유석호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새 여자친구를 만난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바뀌었을 뿐, 여자친구에게 종속되어 매달리던 이전의 그와 뭐가 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길을 떠나는 것의 가치는, 길을 떠나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까지 터전을 잡고 있던 곳과 다른 공간을 향해, 물리적으로 새로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추상적 길에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걸어 나갈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기 위함이다.
2시간 동안 여행을 예찬하고, 여행의 가치를 일깨우고, 당장 여행을 떠나라고 외치는 극이 정작 여행을 떠날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 인물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신기한 풍광을 눈에 담는 것 이외에 유럽으로 떠나야 할 이유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정체성 확인에 실패했으니, 밀가루를 잔뜩 묻힌 튀김마냥 속살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작품을 봐야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