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단돈 6만 원에 김수로와 유럽 여행을?

[안 뻔(Fun)한 티켓북] 본격 여행 조장 음악극 <유럽블로그>

15.02.13 14:07최종업데이트15.11.24 21:48
원고료로 응원
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유럽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대학생들의 로망이라는 유럽여행, 그러나 내가 건너 본 바다는 현해탄이 전부였다. 바티칸의 고풍스러움을, 파리의 자유로움을, 산토리니의 상쾌함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럽은 하우스푸어의 장남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학자금대출을 끼고 있는 나에게, 유럽은 막연한 환상으로만 남아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 어쩌다가 국내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다시 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하나라도 눈에 더 담아두려 바삐 움직였다. 빼곡하게 채운 봐야할 것, 먹어야할 것 리스트를 품에 안은 채 정신없이 움직였다. 수백 장의 '인증샷'을 남기고, 잡다한 기념품과 그보다 더 수북한 영수증을 손에 쥐고서야 만족했다. 그러나 그 여행의 감상은 너무도 빠르게 머릿속에서 휘발되고 다시 떠나고 싶다는 감정만 남는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를 다니던 사람.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스펙'의 소유자이지만, 결혼을 앞둔 시점 갑자기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럽으로 떠난다. 그 역시 유럽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여행 일정을 따라 간다.

빽빽하게 짜인 스케줄 표에 맞춰 움직이던 하동욱. 그에게서, 공간은 다르지만 언젠가의 내가 겹쳐 보였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유럽블로그를 운영하는 '온종일'을 만나 모두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김수로프로젝트가 만든 수작, 여행의 의미를 묻다

▲ 인사하는 김수로 지난 31일, 음악극 <유럽블로그> 커튼콜에서 배우 김수로가 관객 앞에서 인사하고 있다. 음악극 <유럽블로그>는 '김수로프로젝트'의 5탄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프로젝트의 프로듀서인 김수로는 파워블로거 온종일 역할을 맡아 직접 무대에서 땀 흘린다. ⓒ 곽우신


<유럽블로그>는 '믿고 보는' 공연 브랜드로 확고히 자리 잡은 김수로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스스로를 '음악극(Music Drama)'으로 정의한 <유럽블로그>는 형식상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다. 연극(Play)이라고 하기에는 음악의 비중이 높고, 뮤지컬(Musical)이라고 하기에는 노래가 많지 않다.

극에 사용된 넘버 30곡 중, 가사가 있는 노래는 10곡에 불과하다.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노래는, 몇 곡 되지 않지만 높은 호소력으로 관객을 흡입한다. 작 중 스토리는 대부분 대사를 통해 전달되지만, 지속적으로 깔리는 음악이 극 중 상황전달력을 높인다.

여기에 배우들이 직접 유럽 여행을 하며 촬영했던 사진과 영상들이 극 중간 중간 배치된다. 배우는 융프라우에서 신라면을 먹고, 패러글라이딩을 탄 채 날아오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신다. 덕분에 유럽의 풍광을 꽤나 성공적으로 좁은 무대에 옮길 수 있었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처음 접하는 '머글(마니아가 아닌 일반인)'을, '연뮤덕(연극·뮤지컬 오타쿠)'으로 끌어들이는 '입문' 작품이 몇 가지 있다. <유럽블로그> 역시 대표적인 '뮤덕입문용' 작품으로 꼽힌다. 그만큼 <유럽블로그>는 수작이다. 흥행 성적도 꾸준하고, 극의 만듦새도 '웰메이드'라 할 만 하다. 신나고 유쾌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플롯, 배우들의 익살스러운 연기, 관객을 위로하는 메시지까지 고루 삼박자를 갖췄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극 초반, '입국 심사'라는 노랫말에 가장 잘 담겨 있다. 입국 심사를 위한 질문에 답하는 두 인물은, 으레 공항에서 오가는 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입국 심사에 필요한 질문은 인생 전체를 성찰하는 화두를 던진다.

"Why are you here? 이곳에 왜 왔나요. I want to rest. 내겐 휴식이 필요해요.
쳇바퀴 같은 인생 잠시 멈추고
How long will you stay? How long am I staying here?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Where are you from? 나도 모르겠어요. 조금만 시간을 줘요. 이 답을 찾을 때까지.
너무나 어려운 당신의 그 질문들."

많은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다. 가고 싶은 장소, 먹어보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풍경은 취향별로 제각각일지언정 모두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온종일의 말마따나 여행은 관광이 아니다. 여행을 가는 이유는 그런 데 있지 않다.

길은 곧 경험이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경험을 해보겠다는 의미다. 인생 역시 길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쯤 와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를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대체로 이런 성찰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여행은 그 성찰의 시간과, 판단의 근거가 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근본 욕구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잘 살아 왔는지,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내가 걸어온 길에서 살짝 비껴나 삶을 관조할 기회를 선사한다. <유럽블로그>는 이러한 여행의 참의미를 깨달으며 두 주인공이 변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그래서 큰 아쉬움

▲ 배우 성두섭 하동욱 역을 맡은 배우 성두섭이 지난 31일, 음악극 <유럽블로그>의 커튼콜에서 노래하고 있다. 하동욱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를 다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며 유럽을 찾는다. ⓒ 곽우신


그러나 극을 본 뒤엔 왜인지 모를 찝찝함이 남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어떤 세대도, 어떤 계층도 팍팍한 삶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유럽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동욱도 유석호도, 모두 유럽 여행을 당장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 사람은 대기업에 입사 후 풍족한 월급을 받아 착실히 모았고, 다른 이는 동대문 상인으로서 꽤나 돈을 만지는 사람이다.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모으고, 취업준비를 위해 오늘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야 하는 게 지금의 대학생이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너희는 낭만이 없어", "강의실 밖으로 낭만을 찾으러 떠나라"는 말이 얼마나 유의미하겠는가. 직장인도 마찬가지이다. 업무에 치이면서도 생존을 위해 또 스펙을 쌓아야 한다. 이들에게 "너는 왜 기계처럼 살고 있느냐", "너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라"는 말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극 중 인물들은 평범한 우리네 인생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러니 관객으로서 캐릭터에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그저 환상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부유한 데다 재치도 넘치는 남자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환상적인 배우들이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유럽에 대한 환상만 부풀린다. 관객은 그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꿈을 캐릭터에 투영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데 그칠 뿐이다.

감정이입이 안 되니, 온종일을 만나고 변화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이번 <유럽블로그>는 애초부터 초연에 비해 이야기의 중량감이 떨어진 채 각색됐다. 여기에 그저 그런 '해피엔딩' 마무리가, 이전까지 스토리가 쥐고 있던 위로의 메시지를 공허하게 흩어버린다. 유쾌하지만, 극이 끝남과 동시에 그 유쾌함은 금세 휘발된다.

극은 스스로에게,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쾌함이 휘발된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자신만의 여행을 해라"라는 온종일의 조언에, 하동욱과 유석호는 무언가 크게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게 여행, 다시 찾을 수 있을거야. 그게 인생, 잃어버렸던 길에서
이게 여행,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게 인생,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던 하동욱은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산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도 아니고, 새로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그 자리에 그대로 돌아간다. 예정된 결혼을 하고, 아내가 해주는 3분 카레에 울상을 지을 뿐이다. 유석호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새 여자친구를 만난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바뀌었을 뿐, 여자친구에게 종속되어 매달리던 이전의 그와 뭐가 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길을 떠나는 것의 가치는, 길을 떠나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까지 터전을 잡고 있던 곳과 다른 공간을 향해, 물리적으로 새로운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추상적 길에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고 앞으로 걸어 나갈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기 위함이다.

2시간 동안 여행을 예찬하고, 여행의 가치를 일깨우고, 당장 여행을 떠나라고 외치는 극이 정작 여행을 떠날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 인물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신기한 풍광을 눈에 담는 것 이외에 유럽으로 떠나야 할 이유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에서 정체성 확인에 실패했으니, 밀가루를 잔뜩 묻힌 튀김마냥 속살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작품을 봐야할 이유

▲ 배우 홍우진 유석호 배역을 담당한 홍우진이 지난 31일, 음악극 <유럽블로그>의 커튼콜에서 노래하고 있다. 홍우진은 자신을 떠난 여자친구를 찾아 무작정 유럽으로 날아온 인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에서 원단 장사를 하는 그는 하동욱과 여러면에서 비교되는 사람이다. ⓒ 곽우신


<유럽블로그>의 단점이 유독 커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괜찮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부실한 작품에는 아쉬움이 생기지 않는다. 더 재미있으면서도 더 유익한 극이 될 수 있었는데, 배우와 스태프의 땀방울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쉽다.

<유럽블로그>는 관객들에게 일탈을 권한다. 분명 <유럽블로그>는 가난에 치이며 일상을 버티고 있는, 현 대한민국 경제구조의 모순을 지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이 작품에만 물을 수는 없다. 우리는 하동욱이나 유석호처럼 부유하지 않다. 이들이 외치는 것처럼 낭만을 꿈꾸기에는 삶이 너무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이 작품은 분명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고 있다.

일탈해보지 않으면 일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유럽블로그>는 여행을 찬양하는 작품이지 유럽을 찬양하는 작품이 아니다. <유럽블로그>는 관객들에게 유럽으로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디로든 일단 떠나라고 하는 거다. 어느새 우리는 꿈꾸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얽매인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것도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대학 강의 한 번쯤 도망가고 낮술 한 잔 한다고 인생에 실패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휴가 하루 쓰고 놀러간다고 직장 내 경쟁에서 뒤쳐지는 건 아니다. 꼭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지 않아도 그 시간이 오히려 삶의 힘이 될 수 있다.

<유럽블로그>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낭만을 꿈꿔볼 수 있게 해준다. 일탈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준다. 한 번이라도 여행을 떠나본 사람에게는, 그 여행의 향수를 재연하게 만든다. 나를 위한 여행을 아직 떠나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당장 그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준다.

<유럽블로그>는 그런 극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을 이야기한다. 사회가 강조하고, 구조가 강요하는 정형화된 틀을 깰 것을 얘기한다. 우리에게 "이렇게 살면 언젠가 행복해질 거야"라고 속삭이는 모든 거짓말을 부정한다. 온종일은 행복은 적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행복은 쌓아두고 나중에 찾아서 쓰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행복을 찾아 떠나자. 바로 지금.

"인생은 짧아. 고민하지 말고 선택해. 후회하지마. 신경쓰지 말고 출발해.
지금 당장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 널 위한 기차를 타고서 떠나가버려."

▲ 음악극 <유럽블로그>의 포스터 음악극 <유럽블로그>의 포스터. 뮤지컬과 연극 그 어디쯤에 위치한 이 작품은 지난 2014년 10월 21일부터 재연에 돌입했다. 공연은 오는 3월 1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다. ⓒ 연우무대



음악극 연극 뮤지컬 유럽블로그 김수로프로젝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