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이 연결해 준 밀입국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오는 구남의 공포에 짓눌린 시선은 그의 앞날을 예고하고, 구남은 다시는 황해를 건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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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남의 한자음이 '拘男'이라고 한다면, 정학의 공식 직업이 개장수인 것과 상통합니다. 이렇게 영화에서 조선족은 개로 묘사됩니다. 이런 개 같은 사내들이 황해를 건너는 순간 시종일관 쫓고 쫓기며 서로를 물어뜯고 죽이는 개싸움 같은 형극은 결국 오프닝 내레이션의 연장 즉, 조선족들의 처절한 생존을 위한 사투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구남의 사투가 '강남'에서 비롯된 데 있습니다. 승현을 고리로 그의 재산을 노린 아내가 내연남 은행원과 작당해 살인을 의뢰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원 또한 자신의 동업자인 승현과 놀아난 당돌한 정부에 격분해 또 다른 살인을 지시합니다. 결국 구남이나 이어 황해를 건너오는 정학의 욕망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님을 영화는 밝힙니다.
이것은 태원과 승현 역시 결국 강남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살려던 또 다른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들은 구남과 같은 비루한 황구가 아니라, 천민자본에서 주류 자본주의로 편입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반려동물이라는 점입니다.
<황해>의 이런 천민성은 <심장이 뛴다>에서도 천천히 배어 나옵니다. 딸의 심장이식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연희가 선이라면, 재혼한 어머니가 장기를 팔아 마련한 목돈을 하루아침에 말아먹는 휘도는 악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중반부까지 선과 악을 도식적으로 대치시킨 채, 심장을 지키고 심장을 빼앗는 추격신을 거치면서 선과 악의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독실한 기독교신자 연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팽개칩니다.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받고 강남의 잘나가는 영어학원 원장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던 연희는 대신 '산 사람의 심장'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3000만 원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심장이냐, 1억을 호가하는 휘도 어머니의 심장이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감독의 말마따나 영어교육과 교회로 상징되는 강남은 그렇게 산 사람의 심장마저도 서슴없이 사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국경없는 마을과 국경있는 마을영화는 구남의 시선을 따라 한국사회의 두 얼굴을 대치 시킵니다. 아내는 1평 남짓한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 흔적을 찾아 또 다른 벌집촌인 가리봉동 중국인거리로 이어지고 영화는 구남의 시선을 따라 회색빛 도시의 뒷골목에서 찌들대로 찌든 조선족들의 삶의 굴곡과 역경을 '핏빛 폭력'으로 조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