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다."
모든 학생이 하교한 뒤에 학교에서 낙서 종이 하나가 발견된다. 현재의 상황을 비관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위험한 신호가 담긴 종이다. 주인을 잃은 문장 앞에서 학교의 선생들이 모여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요즘 아이들이 별나고 가르치기 힘들다는 말부터 입시가 코앞이니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 누군지 (알아내는 걸) 참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짧은 유서 속에 담긴 간절한 외침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분위기다. 단 한 사람, 정 선생(노진업 분)만이 침묵 속에서 과거의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냉담한 태도로 학생을 대했던 정 선생은 유서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은 교권에서 벗어나 있는 학생도, 착하고 성실한 학생도 모두 죽음을 생각하는 것조차 지쳐있다는 사실이다. 입시 스트레스와 관계의 문제는 물론,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모에 대해서도 학생 모두는 작지 않은 우울 속에서 겨우 나아가고 있다. 내일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생각조차 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그가 떠올린 기억 속에도 그런 소년이 하나 있다.
영화 <연소일기>를 연출한 탁역겸 감독은 홍콩의 떠오르는 신인 감독이다. 2023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24 홍콩 감독조합상에서는 신인감독상까지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 속에 현재 홍콩 사회가 안고 있는 청소년 자살과 우울증 문제를 담아냈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채찍질 당하는 아이들의 현재다. 극 중 소년 요우제(황재락 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교와 폭력 속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시들어갔던 어린 날의 초상이다.
02.
오프닝 시퀀스의 충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밀스럽게 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던 소년은 난간으로 걸어가 걸터앉는다. 그 행동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뇌리에 새겨진다. 조금 음침하지만 고요하고 차분한 프레임 속의 이 불안한 행동을 카메라는 그 모습 뒤편에 고정된 채로 지켜본다. 미들 레벨은 난간에 앉은 소년의 등으로 향한다. 그 순간, 아이는 난간 밖으로 뛰어내린다. 고정된 시선에서는 '자살'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행동이다.
곧 건물 바깥으로 또 하나의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이 보여지지만, 그곳 역시 안전하지는 않다. 안전망 하나 없이 난간 밖으로 내어진 짧은 구조물. 소년의 걸음으로 4-5걸음만 나서면 바로 추락할만한 아주 위험한 공간. 그 위에서 아이는 자신이 홍콩대에 들어가야만 한다며 울부짖는다. 추락하지 않았지만 이 행위에는 많은 것들이 담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떤 복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마주했을 때 그렇게까지 생각하기는 쉽지 않지만, 소년은 방금 자신을 죽인 것과도 같다. 어떤 해석 위에서는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좋은 대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극으로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프레임을 감도는 톤앤매너를 생각하면, 이것은 분명한 죽음이다. 이미.
소년의 이름이 요우제다. 남들에 비해 조금 뒤처진다는 이유로 학교와 가정에서 끊임없는 비교와 폭력 속에 머물러야 했던 아이. 하필이면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생 요우쥔(하백염 분)으로 인해 더 많은 시달림을 겪어야 했던 소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두 가지뿐이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과 조금 더 똑똑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이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생의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