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즐겨 듣는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음악 소개와 함께 청취자의 사연들이 소개된다. 거개가 내 남편, 아내,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 방송을 들으면 세상은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로만 이뤄져 있는 듯하다. 정말 그럴까?

2021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아내, 남편, 아이들로 이뤄진 '전통적인 핵가족'은 전체 가족 중 28%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대로 한부모 가족, 1인가구, 자녀가 없는 가족들은 증가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 쉽지 않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출산율이 줄어 걱정이라면서, 정작 우리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삶에 대해서는 관습의 테두리를 좀처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여기 한 '아빠'가 있다. 그는 아빠가 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왜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서 가정을 꾸릴 수 없었을까. 지난 14일 방영된 KBS 1TV <다큐 인사이트> '이웃집 아이들' 편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아빠와 대디, 그리고 두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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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아침부터 시끌벅적 아이들 등원 준비에 분주하다. 만 네 살의 쌍둥이 딸내미들, 집에서 이들은 첫째와 막내로 통한다. 첫째와 막내를 깨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땋아주는 이들, 바로 '아빠'와 '대디'다.

아빠는 45세 한국인으로 17년차 변호사다. 자라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이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국에선 자신의 그런 모습을 떳떳하게 인정받으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났다.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울 수 있으리라고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그가 이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이웃집 부인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딸들의 의상은 아빠의 센스다.

2015년 하와이에서 아빠와 결혼식을 올린 '대디'는 46세의 일본인이다. 그의 20대 때 일본은 동성애에 폐쇄적인 국가였다. 당연히 결혼이나 아이를 꿈꿀 수 없었다. 그 역시 태평양을 건너 현재 다국적 회계 법인의 세무사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 평생 짧은 머리로만 살아온 그는 딸내미들 머리를 이쁘게 따주기 위해 유튜브와 블로그를 섭렵하며 남모를 노력의 시간을 거쳤다. 덕분에 이제 두 딸은 날마다 다른 헤어스타일을 뽐낸다.

책 <행복의 지도>에서 에릭 와이너는 행복을 찾아 세계 여러 곳을 헤맨다. 스위스에 이르른 그는 그 나라의 행복을 '만족의 기쁨'이라 정의 내린다. 무엇을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이란 뜻이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행복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만족'이 아닐까. 아빠와 대디는 그 평범한 만족을 찾아 저마다의 엑소더스를 실천했고, 그 결과물이 지금 그들이 이룬 가정이다.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 만으로 고국을 떠났다. '이 사람이라면' 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은 '우리도?' 하며 아이를 기대했다. 그로부터 4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아빠의 기도를 신은 들어주셨다.

당신들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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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법적으로 허용된 대리모 출산을 통해 쌍둥이 딸을 얻었다. 아이들이 만 네 살이 되자, 두 사람이 다니던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2023년 로마 교황청이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과 그 자녀에 대한 세례를 허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세례에서 신부님은 말한다.

"당신들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확신을 가지세요. 아이들에 대한 당신들의 사랑이 모든 역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과 일본, 그들이 각자 고국에 남아 있었다면 이런 평범한 행복에 이르는 여정에 닿을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 보통 부모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부모로 살아간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 씩 재택 근무를 한다. 이유식은 당연히 아빠와 대디가 직접 만들어 먹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13권의 육아일기로 남겨졌다. 언제 처음 아빠라고 했는지, 하다못해 똥은 어떻게 눴는지까지 모든 기록이 남겨져 있다. '남들처럼'이 쉽지 않은 그들이었기에 그들이 맞이한 육아의 순간 순간이 모두 소중했다.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과 교류도 한다. 아이들 놀이모임을 함께한 부모와 저녁도 함께한다. 아빠와 대디 집에 놀러온 이웃집 부모는 말한다. 다양성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걸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아이가 생기면서 두 사람의 묵은 숙제도 훨씬 수월해졌다. 아들의 '커밍아웃' 선언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들이 아이를 낳겠다 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오랜 노력 끝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습을 보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밝은 모습의 아들을 본 적이 언젠가 싶었던 어머니는 육아하는 아들을 보며 이제야 '저 모습이 행복한 거구나'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빠의 가족이 왔다가 떠나던 날 공항에서 딸이 무작정 울었다. 아빠는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공항 직원은 엄마는 어디 있냐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아빠는 '남자 둘이 애를 키워 저런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며 생각이 많아진다. 딸은 친구가 '엄마 있냐'고 물어봐서 없다고 대답했단다. 아이들이 자라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편견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사랑으로 키운다 한들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들이 짊어져야 할 짐에 무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아빠는 말한다. 동성 커플의인 아빠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겨도 같이 얘기하고 풀어줄 수 있는 가족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1인가구, 한부모 가족, 딩크족처럼, '아빠'와 '대디'로 이루어진 가족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이룬 가족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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