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은 사람이 영화를 보고 가장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아마 결혼식 축가가 바뀐 부분이지 않을까. 원작 소설에서 흥수(노상현) 역할인 영이 재희(김고은)에게 불러주는 축가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다. 영화에서는 미쓰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이다. '항상 나의 곁에 있어(영원한 사랑)' 달라고 약속하는 지고지순한 부탁은 '자신 없으면 저 뒤로', '날 불안해하지 않는 남자를 찾는다('Bad girl good girl')'는 선언으로 바뀐다. 원작은 2019년에 출간됐다. 당시에도 지고지순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이기에 모순적인 웃음을 자아냈던 축가 선곡이 5년 만에 (보다 직설적이지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영화는 치밀한 분석보다는 각자의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익숙함 덕분이다. 주인공인 재희, 흥수가 익숙하다는 게 아니라 원작자와 동년배로 동일한 시대를 통과한 관객의 입장에서 그렇다. 친숙함 뒤에는 부러움이 찾아온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어정쩡하게 놀고, 이도 저도 아니게 공부해 결국 별거 없는 사회인이 된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고개를 든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찾아낼 수 있었던 최적의 타이밍을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외면해 온 진실이 흥수와 재희를 보며 다시 피어오른다.

재희의 말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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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이 다수의 공감대를 불러올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우정을 쌓게 된 날, 클럽에서 나온 재희는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흥수를 발견한다. 재희는 흥수의 등짝을 후려치고는 한참 웃더니 별안간 팀플을 제안하고 술 한잔하러 가자고 말한다. 닭도리탕과 소주를 깔아둔 술집에서 흥수는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냐 까칠하게 묻는다. 재희는 무심하게 대꾸한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냐?"고.

재희가 흥수에게 했던 말은 사실 본인에게 먼저 적용된다. 재희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한다는 이유로 '걸레' 취급을 받는다. 그 와중에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자주 봉변을 당했다. 그런 20대를 지나온 재희가 남편에게 '꼭 내게만 내 꿈을 맡기고 싶어'(영원한 사랑)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건 성장의 증거가 아닌 정체의 흔적 아닐까 싶다. '겉모습만 보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시선이 웃긴다'('Bad girl good girl')는 변화가 옳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부러움과 후회보다 부끄러움이 크게 다가온다. 동일하게 00~10년대에 20대를 보냈지만, 나의 자리는 흥수와 재희는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오히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괴짜, 별종으로 단정하고 바깥으로 몰아내던 쪽에 가까웠다. 10여 년이라는 시차, 주인공들의 대학 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에 <대도시의 사랑법>을 반짝이는 성장영화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뿐이다. 동시대를 사는 나였다면 영화 외적인 면을 들어 혹평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국내의 영화 커뮤니티를 훑어보면 혹평의 주된 이유가 대체로 한 가지로 좁혀진다. 영화에서 왜 정상적인 남자가 등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영화속 남자들은 단체채팅방에서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몰래 바람을 피우고 심지어 데이트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곧 여성은 절대적인 피해자고, 게이만 괜찮게 그려지는 게 정치적 올바름이냐는 비아냥으로 연결된다. 당시 남성 집단 저류에 깔려있던 비참한 수준의 인권 의식이 메신저를 이용한 딥페이크 범죄 등으로 오히려 한 단계 진화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걸 보면 <대도시의 사랑법>이란 성장영화의 필요성이 더 도드라진다.

동료, 친구, 지인 중에 LGBT가 있습니까?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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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면 '데이트폭력이 커밍아웃만큼의 무게감이 없다'는 한 작가의 지적에도 공감한다. 이슈의 우열을 가리는 건 아니다. 다만 데이트 폭력을 당한 재희를 수단으로 삼아 흥수의 소박한 커밍아웃으로 연결시켜 소비된 느낌이 아쉬울 수 있다는 점이 이해된다. 신입생부터 치열한 취업준비를 하는 현재의 대학생에게 일주일에 8일을 술 마시는 선배들의 철지난 무용담이 쉽게 받아들여질지도 의문이다. 정작 청춘영화가 필요한 청춘들에게 공감대를 사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지난 8월 대법원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동성혼을 반대한다는 보수단체 시위에 여전히 100만 명이 운집한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가 2014년 약 3200명의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터에서 만난 당신의 동료들은 귀하의 LGBTI 정체성을 압니까?'라는 질문에 80% 이상이 '거의 모른다' 혹은 '아무도 모른다'고 답했다.

'LGBTI'란 레즈비언(lesbian)·게이(gay)·바이섹슈얼(bisexual)·트랜스젠더(transgender)·인터섹스(intersex)를 줄인 말이다. 물론 내 옆자리의 사람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80% 이상 거의 모른다는 답은 내 주위의 소수자가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데 언급하며 조심스러운 아이템 중 하나가 퀴어와 같은 정체성 이슈다. 가족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흥수의 고민이 전반에 깔려있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리뷰하며 퀴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데, 시스젠더 헤테로(신체적 성과 사회 문화적 성의 일치, 이성애자)의 입장으로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감히 응원하느니 마니 말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부디 이 리뷰 역시 누가 되지 않기를 조심스레 바라며 다소 늦게 도착한 <대도시의 사랑법> 극장 관람을 적극 추천한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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