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한국야구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우리만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부터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대를 맞이하며 조선의 야구인들은 전국 각지에서 미군과의 친선경기를 가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 사정상, 야구인들은 야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군의 지원이 필요했다. 미군 역시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야구 종주국답게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야구 경기 이벤트는 자국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한국인들과 교류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미군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전력상 한국 대표팀은 미군 대표팀을 이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잉거프리센 미군 소령은 친선경기를 앞두고 "만일 우리를 상대로 점수를 낸다면 1점당 야구공 120개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는 당시 화페가격으로 3만 원이며, 1946년 기준으로는 서울의 중급주택(약 1만 3000원)을 2채 사고도 남는 비싼 가격이었다. 야구가 괜히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한편으로 그 정도로 미군이 우리 대표팀의 실력을 만만히 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한국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미군과 접전을 벌였다. 비록 끝내 패하기는 했지만 점수를 내는 데 성공하며 접전 끝에 3대 4. 불과 1점차로 석패했다. 놀란 미군은 결국 약속대로 30다스(약 9만 원) 상당의 공을 지급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낸 360개의 공은 훗날 한국의 야구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씨앗이 된다.
1946년 국내 최초의 학생 야구제전인 '청룡기' 대회가 열렸다. 대회 주최자로 개최 자금이 필요했던 <자유신문>이 은행에 담보로 맡긴 것이 바로 미군으로부터 받았던 야구공 30다스였다. 선배들이 미군과의 경기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해 받아낸 공 덕분에, 한국야구의 꿈나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야구는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르면 야구 경기가 TV와 라디오 등을 통하여 중계되며 야구의 인기가 크게 높아진다.
1963년 9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이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숙적 일본을 예선과 결승에서 두 번이나 격파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대표팀의 4번 타자로 결승에서 홈런과 결승타점 포함 3타점을 홀로 책임지며 승리의 주역으로 활약한 인물이, 훗날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김응용이다.
아시아선수권 우승은 한국야구가 국제무대에서 최초로 정상에 올랐던 기념비적인 장면이었다. 또한 광복 이후 국제대회에서 일본에 당한 7연패 사슬을 끊어낸 최초의 승리였다. 일본야구를 넘어서야 한다는 모든 국민들의 간절 염원을 야구대표팀이 광복 18년 만에 이루어낸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국민적 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