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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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는 왜 학살을 저질렀나'편을 통해 오늘날의 네덜란드가 어떻게 지나간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고 관용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조명했다. 장붕익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네덜란드라는 국가명의 어원은 '바다보다 낮은 땅'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네덜란드는 지형적으로 국토의 약 24%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특성이 있다.
초기의 네덜란드인들은 바다와의 경계면에서 제방을 쌓고 물을 퍼내어 땅을 개척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암스테르담도 강의 이름인 암스텔(Amsterl)과 댐(Dam)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인들은 13세기 무렵으로 대서양과 북해에서 많이 잡히던 생선인 청어를 활용한 산업과 중개 무역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선박 기술이 발달하면서 해운업도 성장한 네덜란드는 '마다의 마부'로 불릴만큼 해상 무역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또한 네덜란드는 새로운 땅을 일구는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하며 현재 대한민국의 충청북도만한 크기의 영토를 새롭게 개척해냈다. 제방에서 물을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하는 풍차와, 새로운 땅을 활용한 낙농업 등도 발전했다. 상업의 발달로 돈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귀족,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이익을 추구하는 열린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16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종교 개혁'이 네덜란드에서 크게 호응을 얻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가톨릭 구교는 농업을 중시하고 돈을 중요시하는 상업은 천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신교인 칼뱅교는 '직업은 신이 내려준 소명이기에, 농업이든 상업이든 직업상의 귀천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상을 전파했다. 상업 중심 국가인 네덜란드 사람들로서는 가톨릭보다 칼뱅교의 교리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지역을 통치하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칼뱅교를 강력하게 탄압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들은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을 일으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고 1581년 세계 최초의 공화국인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한다. 1648년에 신구교간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이 수립되면서 네덜란드는 정식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대항해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바다를 통한 해외진출에 눈을 돌리게 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스페인 등 유럽 강국들에 비해 후발주자로 출발했다. 무역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한다.
영국, 네덜란드 등 몇몇 유럽 강국들이 설립한 동인도 회사는, 대항해시대에 유럽 국가들의 아시아 지진출을 목적으로 한 무역 회사였다. 명목상은 회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를 운영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해상패권을 경쟁하기 위하여 설립돼 독자적인 군사력과 아시아 독점 항해권, 무역 상관까지 막강한 권한을 갖춘 일종의 식민 통치 기구에 가까웠다. 이러한 동인도회사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정책을 언급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조직으로 평가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주식시장과 금융 산업의 발전이다.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귀족과 상인만이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들, 하층민들까지 주식을 구입할 수 있게 했다. 상업이 발달해 계산이 빨랐던 네덜란드인들은막대한 배당금이 걸린 주식에 열광했고, 돈벌이가 될만한 기회가 포착되면 결코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거대한 주식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주식 사업으로 몰린 거대한 자본금은 동인도 회사가 대규모 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경제적 기반으로 이어졌다. 1609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로 주식 거래소에 이어 중앙 은행이 설립되며 네덜란드는 유럽 금융 산업의 중심지로 올라서게 된다.
원주민 93% 학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
한편으로 아시아로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상 무역 패권을 놓고 유럽 강국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동인도회사는 유럽에서 값비싼 청향, 육두구 등 '향신료' 산업 독점을 노렸다. 먼저 원산지인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동인도회사인 원주민들과 연합해 원래 이 지역을 장악했던 포르투갈을 몰아낸 뒤, 이후에는 원주민들까지 학살하며 각 섬을 장악했다.
당시 잔인한 일본 용병들에 의해 1만 4천여 명에 이르던 원주민의 93%가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겨우 480여 명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인도회사는 1636년에는 대만을 침공해 주민들을 동굴로 몰아낸뒤 봉쇄 후 8일동안 독가스를 넣어 학살했고, 심지어 시신의 일부는 전리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또한 말루쿠 제도를 놓고 경쟁하던 영국의 무역상인들을 강제로 구금해 죄를 뒤집어 씌우고는 고문하거나 처형하기도 했다. 이는 향신료 독점을 위해 온갖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만행도 서슴지 않은 동인도회사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증거들로 남아있다.
결국 네덜란드는 1663년 말루쿠 제도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며, 약탈과 학살의 대가로 향신료 독점에 성공한다. 17세기 동인도 회사의 향신료 교역 규모는 1억길더(현 한화 2조 1천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말루쿠 제도 장악 이후 번성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30년 사상 최대 수입을 달성했고,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는 자타공인 유럽을 대표하는 해상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무역거래의 총액은 세계 무역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실상 '국가밖의 국가'로 자리매김한 전성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시가총액은 현재 기준으로 한화 1경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 공식적으로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애플(4397조 7770억 원)을 아득히 뛰어넘는 놀라운 규모다.
네덜란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가리켜 '황금 시대'로 불리운다. 당시 신흥부자들이 넘쳐나던 네덜란드에서는 도시에 큰집을 짓고 시골에 별장을 지으며 사치를 누리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황금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네덜란드의 해상패권 장악을 견제하는 영국의 등장으로 영란전쟁(英蘭戰爭)이 발발하게 된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22년간 세 차례 벌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네덜란드가 패배해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고 국력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어 약 백여 년 뒤에는 네덜란드가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영국이 제 4차 영란전쟁(1780-1784)을 일으키며 또다시 크게 패전한 네덜란드는 사실상 영국에게 해상강국의 자리를 완전히 내주게 된다. 또한 이 패배의 여파로 무역상권을 상실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799년 파산하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과거 만행 사과하고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