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작 영화 <완벽한 가족>에서 엄마를 연기한 수잔 서랜든은 말기 암 환자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가족들은 물론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대하지만 결국 엄마의 뜻을 따르기로 하는데. 이제 안락사를 앞둔 엄마는 가족들에게 소중한 선물을 한 가지씩 전한다. 그렇게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엄마가 큰 딸에게 준 선물이 뜻밖에도 '바이브레이터'였다. 도대체 엄마는 왜 늘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들이 먼저였던 큰 딸에게 저런 엉뚱한 선물을 주었을까? 그 답을 10월 12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jtbc 주말극 <정숙한 세일즈>에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

 정숙한 세일즈
정숙한 세일즈jtbc

<정숙한 세일즈>라는 점잖은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성인용품을 파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원작은 2016년 영국 iTV에서 방영된 6부작 <브리프 엔카운터스>( Brief Encounters ) 이다. 보수적인 1980년대의 영국은 1992년도 금제라는 시골 마을이라는 배경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이나, 1992년도 한국이나, 작품이 '시대극'을 표방하듯이 <응답하라> 시리즈와 유사한 '복고풍'의 시대를 배경으로 거기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숙과 바이브레이터의 공통점?

주인공 한정숙(김소연 분)은 금제 고추 아가씨 출신으로 서구적인 미모를 자랑한다. 게다가 공부도 잘 했단다. 하지만 옛 어른들 말에 따르면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던가, 그녀가 선택한 남자 '성수'로 인해 그녀의 삶은 쭉 고달팠다. 금제 경찰서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성수는 어느 직장 한번 진득하게 다닌 적이 없었고, 이제 막 어렵게 들어간 금제 고추장 회사에서도 사장 아들을 손 봐주고 쫓겨난 데다 집세를 내려고 정숙이 숨겨 놓은 돈을 꺼내 투자랍시고 날린 처지다.

오금희(김성령 분)네 집에서 집안 일을 봐주며 돈을 버는데도 정숙은 늘 월세를 못내 집주인과 숨바꼭질을 하는 처지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된다 싶었을 그때 모처럼 사 들고 온 고기를 싼 신문지에서 월 수 50만원 이상의 여성 부업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서영복(김선영 분)을 만난다.

정숙으로 말하자면 고기 사러 간 정육점에서 동네 아낙 들이 실없이 나누는 음담패설에도 정색을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였지만 도무지 앞날에 대한 대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남편을 믿고는 도저히 살아볼 길이 없겠다 싶으니 덥석 유망하다는 야한 란제리와 성인용품을 잡아 들었다.

 정숙한 세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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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를 넷이나 낳은 영복을 보고 여전히 '마돈나'같다는 남편은 착하지만, 결혼할 때 사주를 보니 자신은 아내 덕으로 살아갈 거라고 실실거리는 무능력자이다. 동네 사람들마저 부러워하는 부부 금실이 그녀에게는 중학생 딸에게 공부방은 커녕 책상조차도 사주지 못하는 천벌이라 여겨지는 상황에서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덥석 야한 란제리와 성인용품을 받아들고 나선 정숙과 영복, 이렇다 하게 인맥도 없는 두 사람은 우선 정숙이 일 나가던 오금희와 미용실을 하는 이주리(이세희 분)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렇게 정육점 주인 아줌마, 미용실 단골, 거기에 초대 받지 않은 금제 큰 손 허영자까지 다 모인 첫 번 째 상품 설명회는 란제리와 세트 상품인 '바이브레이터'가 등장한 순간 초토화되고 만다. 거기에 오금희의 남편까지 등장해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데.

도발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정숙한 세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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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 시골 마을에 등장한 성인용품 판매라니! 하지만 앞서 수잔 서랜든의 <완벽한 가족>에서 엄마가 딸에게 전한 유품이 '바이브레이터'이듯 <정숙한 세일즈> 속 이 '물건'의 함의는 만만치 않다.

극 중 정숙은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 하고, 마음도 착한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능력 대신 성수의 아내라는 자리에 자신을 맞추어 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그녀의 삶은 척박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에게 사촌 누나가 들던 요술공주 핑키 빨간 가방이라니 말이다. 게다가 설상가상 그녀가 성인용품을 판다고 난리 피다 싸우고 집을 나간 남편 성수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미화와 바람까지 핀다.

그녀가 그토록 애써 가꾸려 했던 'sweet home'이 사상누각이었음을 하루 아침에 절절하게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남편에게 기대는 대신 그녀 스스로 '호구지책'을 해결하려 나선다. 이렇게 누군가 아내로서의 자리 대신 스스로 독립해 나가야 하는 정숙의 모습은 그녀가 파는 '물건'의 용도와 '통'한다.

그녀가 파는 란제리는 그걸 통해 남편과의 '사랑'을 더 불타오르는 용도이기도 하지만, 오금희가 그 란제리를 입고 남편 앞에서 펼쳐보이듯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을 느끼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바이브레이터' 는 단순한 쾌감의 도구를 넘어, 여성 스스로 자신의 성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도구, 즉 가장 본능적이지만, 가장 솔직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정숙이라는 한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라는 자리를 넘어 한 사람으로 스스로 서는 과정을 독특하게도 성인용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펼쳐낸다. 또한 정숙의 성장만이 아니라, 그녀가 한 사람으로 우뚝 서나가는 과정에 서영복, 오금희, 이주리와의 연대와 우정이 톡톡하게 한 몫을 한다. 말 그대로 '이대 나온 여자'로 그 시절에 벌써 아이 없는 딩크 족을 지향했지만 시골 마을 금제에서 외톨이가 되었던 오금희는 정숙, 영복을 도우며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삶의 재미와 의미를 느껴간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미장원을 하던 주리라고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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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드라마의 소재로써도 꽤나 파격적이었던 <브리프 엔카운터스>가 <정숙한 세일즈>가 되었다. 주인공 김소연을 비롯하여, 김성령, 김선영을 비롯한 출연진들의 맛깔난 연기와 80년대 영국을 금제라는 보수적인 시골 마을로 옮긴 설정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거기에 영국이고 한국이고 가릴 것 없이 능력은 없지만 목소리만 큰 가부장제 아래 그저 견디고 참는 것만이 삶의 지혜인 줄 알았던 우리네 여성들의 모습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배경 속에서 '한'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한'의 상황을 떨쳐 '성인용품'이라도 팔아서 삶을 개척하겠다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도발적이고도 매력적이다. 그 발칙한 마케팅에 시청자들도 호응하고 있다. 시청률도 상승기류를 타고, 넷플릭스 드라마 순위에서 당당하게 1위로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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