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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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바다를 닫아 유럽에 무너진 패권국가 중국'편을 통하여 중국 왕조의 해양진출과 쇠망사를 조명했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4남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 건문제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영락제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해외 원정을 추진한다.
영락제가 굳이 육로도 아니고 중국 왕조 사상 전례없는 해상 원정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명나라는 외부로는 티무르 제국 등 강성한 이민족들에게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어서 육로를 통한 해외진출이 쉽지 않았다. 영락제는 해상 원정을 통하여 중국 중심의 지배질서를 전파하고 외국의 조공과 예우를 받음으로써 황제로서의 권위를 높이려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1371-1434)에게 함대를 조직하여 바닷길로 대규모 원정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정화는 당대에는 색목인(色目人, 서방계 민족) 으로 불리우던 우즈베키스탄계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당시 해외 해상무역의 중심은 이슬람 상인들이었고, 영락제는 무슬림 출신으로 이슬람 문화에 밝은 정화를 해상원정을 이끌 최적의 인물로 낙점했다.
정화의 대원정에 참여한 함대는 총 선박 62척에 함선의 길이는 약 125미터에 이르렀고, 원정단의 규모는 무려 2만 7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구성원들은 당시 통역사, 수리공, 의사, 기상관까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졌다.
정화의 대원정은 훗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콜럼버스보다 무려 80년이나 앞선 항해였다. 규모면에서도 단 3척의 배에 88명의 선원에 불과했던 콜럼버스 원정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화의 대함대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엄청나게 큰 붉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며 그 남다른 스케일을 짐작게 한다.
정화의 함대는 1405년부터 약 30년 가까이 총 7차례의 원정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까지 도달했다. 마지막 원정에서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까지 도달하여 무슬림인 정화가 사원에서 참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정화 함대의 항해거리는 약 18만 5천킬로미터에 이르렀고 이는 지구(둘레 4만킬로)를 무려 네 바퀴 도는 거리에 해당한다.
정화는 대원정을 통하여 약 40여 개의 나라와 조공 관계를 수립했다. 명나라가 훗날의 유럽 제국들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외국들과 평화적인 조공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일방적인 정복과 착취가 아니라 상호 답례 형식의 '조공무역'이라는 독특한 외교방식 덕분이었다.
우호국이었던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보듯, 명나라는 외국의 사신이 찾아오면 받은 조공품보다 훨씬 비싼 답례품이나 보상을 내리는 일도 많았다. 이는 명나라가 경제적 손해보다는 조공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명분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었다.
대원정 이후 해외의 많은 나라들이 앞다투어 명나라를 방문하여 조공 관계를 형성했다. 자연히 중국의 백성들은 명나라의 권위를 드높인 황제를 칭송했고, 영락제는 쿠데타로 황제가 된 폭군에서 성군으로의 정치적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이를 적극 활용했다.
7번의 대규모 해상 원정은 잠시나마 전세계를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로 연결하는 오작교 역할을 해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어쩌면 전세계의 바다를 장악하는 선두 주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명나라는 바다에서 시작될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해양 정책을 전면 철회하는 의외의 선택을 내린다.
이는 애초에 대원정 자체가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추진된 전략이라기보다는, 단지 영락제 개인의 정치적 의도와 사정에 따라 이루어진 정책에 불과했다는 한계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해상 대원정은 중국 중심의 지배질서를 인정하게 만드는 명분에만 치중했을뿐, 훗날의 유럽처럼 적극적으로 식민지 개척이나 정복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중국의 해양 정책이 적극적인 해외진출에서 내수 위주로 전환하게 되는 기점은, '수도 이전과 대운하 건설'이었다. 명나라는 본래 주원장이 강남에서 건국하여 몽골족을 밀어내고 세운 최초의 남방 왕조였다. 하지만 북방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영락제는 남경보다는 자신의 세력기반이 있는 북경으로의 수도 천도를 결정한다.
그런데 북경 인근은 당시만 해도 척박한 환경과 물 부족으로 인하여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또한 수로가 없어서 외부로의 물자 수송도 어렵고 북방 국경과 가까워 여러모로 수도로는 부적합한 땅이었다.
이에 영락제는 '경항 대운하'를 건설하여 약 20만 명의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길을 새롭게 만들었다.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강행한 대운하 덕분에 이후로 북경까지 원활하게 물자 수송이 가능해졌고, 중국 왕조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남북간의 국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탄탄해진 내수로 상업과 문화의 풍요로운 발전까지 가져오게 된다. '명나라의 지중해'로 불리는 대운하의 건설은 영락제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도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대운하의 대성공은 장기적으로 훗날 중국의 해양과 국제정책에 있어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나비효과를 불러왔다는 상반된 평가도 받고 있다. 대운하의 가치를 확인한 영락제는 아예 바닷길을 닫고 오직 대운하만 이용하게 하는 파해운 정책을 지시한다. 1424년 영락제가 북방 정벌중 건강악화로 사망하고, 9년 뒤에는 정화마저 마지막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항해도중 세상을 떠나면서, 대원정을 이끈 주역 두 사람이 모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영락제와 정화의 사후, 대원정에 참여했던 선원들은 해산했고, 대원정을 통하여 어렵게 쌓아올린 풍부한 항해기술과 노하우는 그대로 단절됐다. 대운하를 통하여 내수가 증진되며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 중국인들은 굳이 힘들게 바다로 해외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가리켜 중국의 해양정책이 '대후퇴'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바다를 소홀히 여긴 것은 먼 훗날 중국이 유럽에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명나라가 해양진출을 주저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북로남왜(北虜南倭)는 명나라 시대에 변경을 침범하는 북쪽의 유목 민족(북로)와 남쪽의 일본 해적인 왜구(남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민족들과 끊임없는 적대관계를 형성했다. 1449년에는 토목의 변(土木堡之變)이 발생하여 명나라 황제 정통제가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와의 전투중 포로로 사로잡히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락제의 천도 이후 수도 북경이 북방민족들과의 국경에 가까웠던 명나라는 끊임없이 안보위협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는 약 150여 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보강하며 북방민족들을 상대하는데 국력을 집중해야 했다.
또한 14세기부터 남쪽에서는 일본의 왜구들이 중국과 한반도, 동남아시아의 해안을 약탈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 명나라 11대 황제인 가정제 시대에는 40여년간 왜구의 침공 횟수만 약 600여회에 이르며 막대한 피해를 입힌 시기를 '가정대왜구'라고 부른다. 만력제 시절인 1592년에는 전국을 통일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명나라도 이 전쟁에 참전하여 막대한 군비를 소요해야 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