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제국(Roman Empire, 기원전 27년-1453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고대 정복 제국으로 꼽힌다. 공화국에서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수많은 나라와 지역, 민족을 아우르는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해냈고, 누구보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또한 2천여 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다양한 변화와 체제를 거친 로마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현대정치 체제의 기초가 되며 그 영향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토록 강대했던 로마제국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퇴와 몰락은 피할수 없었다. 과연 로마가 무너지게 된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팍스 로마나

 tvN <벌거벗은 세계사>

tvN <벌거벗은 세계사> ⓒ tvN


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천년제국 로마는 어떻게 몰락했나' 편을 통해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조명했다. 반기현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 테베레강 인근에 위치한 일곱 언덕이 있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다. 로마인들은 수많은 전쟁과 동맹을 통해 주변국가들을 하나둘씩 점령하며 세력을 키웠다. 로마는 건국 480년만에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한 데 이어 기원전 1세기에는 지중해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기원전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vgvstvs, 기원전 63-14)가 즉위해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수도 로마의 도시를 재정비해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를 대도시로 확장하는가 하면, 대규모 정복활동과 도로 건설에도 나선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시작된 사업으로 로마의 방대한 각 영토를 아우르는 약 8만5천km 거리에 이르는 도로망이 정비되는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표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이 정복한 속주(Provincia)들을 지역에 따라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총독들을 파견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로마의 속주는 28개에서 말년에는 35개까지 늘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들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유연한 포용정책을 펼쳤고, 속주민들에게도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로마 시민권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고, 확실한 혜택과 엄중한 군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의 기반을 닦았다. 로마제국 황금기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도시 건설, 속주 정비, 군대 체계 구축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내며 평화와 질서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 황금기의 기틀을 닦은 명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후 로마제국은 12-16대 황제인 '오현제 시대(96-180,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들이 이전이나 이후의 황제들과 다른 성공비결은, 대부분 자신의 혈통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세습제가 아닌,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아 황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오현제는 무너진 사회체제와 질서를 바로잡고 수많은 개혁을 이뤄내며 로마제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오현제 시대에 로마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으며, 로마인들은 제국의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이 당시 로마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소가 콜로세움(Colosseum)이다. 로마인들은 투기장인 콜로세움에서 고대의 전투를 재현한 검투사 대결과 모의해상전투 등을 즐기며 열광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거대한 콜로세움을 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고도로 발전된 상수도 시절까지 갖춘 최첨단 도시였다. 로마는 한동안 큰 전쟁이나 재난같은 국가적 위기없이 오랜 평화를 누리며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기원전 1세기-2세기)라는 황금기를 누리기에 이른다.

잘나가던 로마는 어떻게 무너져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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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제 시대가 끝나면서 로마제국의 찬란한 영광에도 서서히 그늘이 드리기 시작한다. 17대 황제 콤모두스는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악역인 폭군 콤모두스(호아퀸 피닉스)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우스는 선대 오현제들과는 달리 자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고 이는 제국의 몰락을 초래하는 오판이 된다. 사실 콤모두스는 재위 초기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제국을 통치하는 듯 했으나, 친누나와 조카가 연루된 암살미수 사건 이후 큰 트라우마를 겪으면서 괴팍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콤모두스는 자신을 신화속 영웅이라 여기며 검투사 시합에 나가는 것을 즐겼고, 황제에게 저항할수 없는 포로와 노예 검투사를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기록에 따르면 콤모두스는 총 735회나 검투사 시합에 출전했고 학살한 사람들은 1만 2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스로를 구경거리로 만든 콤모두스로 인해 황제의 권위는 땅에 추락했고, 정작 황제의 본분인 국정을 장기간 방치하면서 제국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다. 결국 콤모두스는 192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근위대 병사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콤모두스의 죽음은 혼란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로마제국은 여러 황제들이 즉위했다가 얼마가지 못해 암살을 당하는 상황이 반복돼 극심한 정치적 혼돈에 빠진다. 정통성없이 무력만 앞세운 군인 출신이 너나 할 것없이 황위를 노리는 상황이 속출하기도 했다.

특히 막시미누스 황제부터 약 50년에 이르는 군인 황제의 시대(235-284) 동안 황제를 자처한 이들만 50여 명에 이르며, 이중 원로원이 정통성을 인정한 황제는 단 26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암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불과 20여 일 만에 단명한 황제에서 한 해에만 무려 6명의 황제가 즉위하는 혼란이 지속됐다.

더구나 황제 자리를 걸고 내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중산층인 농민들이 병사가 돼 강제로 전쟁터가 끌려나가게 되자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이 끊긴 로마 경제체제에도 막대한 타격을 안기게 된다. 제국의 통치질서가 무너지면서 상류층인 귀족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게 됐고, 그동안 귀족들의 기부와 후원으로 이뤄져오던 국가적 사업이나 사회 기반 시스템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로마도 대도시의 번영을 잃고 차츰 쇠락하게 된다. 로마사에서는 이 시기를 '3세기의 위기'(Discrimen Tertii Saeculi)로 칭하며 제국의 난세이자 쇠퇴기로 꼽고있다.

44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꼽힌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려 최초로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인물이다. 이어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했던 로마를 떠나 기독교 지지세력이 강했던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천도할 것을 결정하고 도시명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변경했다. 사실상 제국 분열의 서막이었다. 이로써 로마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상징적인 도시로 전락했다.

50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면 아예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지정했고, 사후에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에게 분할 상속한다. 이로서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완전히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는 후대의 평가이고, 당시의 로마인들은 제국이 분열됐다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대 국가들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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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제국은 곡창지대였던 이집트 일대를 영역으로 보유해 농업 생산량이 풍부했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국제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다. 반면 서로마제국은 분할 이후 그동안 누려온 경제와 지리적인 이점을 동로마제국에게 내주게 되면서 활력을 잃고 쇠퇴해갔다.

여기에 '게르만의 대이동'은 서로마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타가 됐다. 게르만인은 당시 로마인들이 게르마니아(오늘날의 프랑스)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내려온 고트족, 반달족, 앵글론-색슨족, 프랑크족 등 여러 이민족들을 아우르는 총칭이다.

제국의 전성기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나 서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잦은 내전과 전염병으로 인한 인구감소, 인플레이션으로 군인에 대한 보상지급 등이 어려워지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다. 결국 제국은 게르만인을 돈을 주고 용병으로 고용해 국방력을 의존하게 되면서 '이민족으로 이민족을 막는' 미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기 4세기 후반 기마 유목민족인 훈족이 '기후 변화'로 식량을 찾기 어려워지면서 극심한 추위를 피해 흑해 연안과 동유럽으로 대거 진출했고 게르만의 영역으로까지 넘어오게 된다. 고대의 흉노 혹은 이란 계통으로 추정되는 훈족은, 후대의 몽골족처럼 강력한 전투력과 호전성으로 게르만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고 한다. 게르만인들은 훈족과의 경쟁에서 밀려 서로마제국의 영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서로마제국은 연이은 이주로 게르만인들의 인구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크게 증가하게 되자 점차 경계하고 배척하는 움직임을 드러낸다. 이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서로마제국을 침공하여 전쟁이 벌어진다. 410년, 서고트족은 결국 로마를 점령하게 되고 사흘에 걸쳐 로마의 공공건물을 파괴하고 역대 황제들의 영묘를 약탈했다. 이어 황제의 누이동생을 비롯한 로마의 수많은 귀족과 시민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노예로 판매하기까지 했다. 당시 고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더 이상 외적의 침입에 대항할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동로마제국 역시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느라 서로마제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서고트족은 서로마제국의 영역이던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서고트족의 약진을 보며 로마의 쇠퇴를 확인한 다른 게르만족들도 앞다퉈 로마의 영역을 차지한다. 455년 로마는 반달족의 침공으로 두 번째 약탈을 당했다. 476년에는 게르만인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마침내 서로마제국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물론 같은 뿌리를 지닌 형제 국가인 동로마제국의 역사는, 서로마 멸망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러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한 1453년까지 천년 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로마의 발원지와 전성기를 대표하던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세계사에서 '서양 고대세계의 종말과 중세의 시작'을 의미하는 분기점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로마의 쇠퇴는 지나친 위대함의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평가다. 한때는 전세계를 호령하던 천년제국 로마는 멸망하기 직전에는 인구 감소, 이민자 폭등, 경제적 불평등과 인플레이션, 기후 위기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휘말렸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현대 국가들이 직면한 현안과도 상당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거대한 강대국이라도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지못하고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재난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할 이유다.
벌거벗은세계사 로마제국 유럽사 국가멸망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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