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식을 것 같지 않던 여름의 열기가 사라져간다. 가을이 왔다. 푸르던 나무들도 조금씩 물들어 가기 시작하고, 더불어 마음도 스산해지는 계절,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그립다. 이런 시절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 한 편 어떨까? 이심전심처럼 두 편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됐다. 쿠팡플레이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과 ENA의 <나의 해리에게>이다.

공교롭게도 <나의 해리에게>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모두 '사랑'이 끝나고 난 후 시작되는 이야기들이다. 사랑이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두 드라마 속 남녀들의 인연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의 해리에게] 미움도 사랑일까?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스틸컷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스틸컷 ⓒ ENA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포스터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 포스터 ⓒ ENA


주은호(신혜선 분)와 정현오(이진욱 분)는 PPS 28기 아나운서 동기다. 8년 동안 연애를 했다. 하지만 주은호가 '결혼'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낸 순간, 그들의 관계는 끝났다. 그 후로 4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주은호는 현오를 대놓고 미워한다. 가지고 싶었는데 가질 수 없으니 잊기 위해서란다. 정현오도 만만치 않다. 주은호에게 '네가 창피하다' 고 한다. 자신이 신경 쓰이지 않게 잘 지내야 하는데, 사람들이 도대체 왜 주은호같은 애랑 사귀었냐고 말하는 게 듣기 싫단다. 그러니 자기 신경 쓰이지 않게 잘 좀 살아 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정현오는 사사건건 주은호를 신경 쓴다. 프로그램에도 꽂아 주고, 그녀의 편의를 위해 시간까지 바꿔준다. 멘트를 가로챘다고 주은호는 분개했는데 알고 보니 옷이 찢어진 그녀를 배려해서였다. 그녀가 냉동차에 갇혔다니 신발까지 짝짝이로 신고 달려와 그녀를 구출한다. 후배랑 데이트도 못하게 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정현오에게, 주은호는 차갑게 말한다. 다음엔 자기가 죽어간다 하더라도 오지 말라고.

과연 두 사람의 진심은 뭘까?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정지현 피디가 연출하고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한가람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는 주은호와 정현오의 사랑을 색다르게 접근한다. 자기 마음의 벽 안에 서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 두 사람 대신, 주혜리와 강주연(강훈 분)의 연애사를 통해 '사랑'에 대해 환기시키는 방식이다. 심지어 여기서 주혜리는 주은호의 또 다른 인격이다.

정현오와의 오랜 연애가 미움이 되고, 직장에서도 후배에게 '사과하세요'란 말을 듣는 처지가 된 주은호.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또 다른 인격이 돼 하루의 나머지 반을 산다. 그리고 그 또 다른 인격은 실종된 그녀의 여동생인 듯하다.

지금은 남남이 된 정현오를 잊기 위해 미워한다는 주은호는 사랑의 상실감과 직업적 딜레마를 '자신'을 잊는 것으로 해소하려 한 것이다. 드라마는 자신의 벽 안에서 으르렁거리면서도 서로 관심을 놓지 못하는 현오-은호 커플의 이야기와 서로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한 발 한 발 가까워져가는 해리-주연의 연애사를 나란히 배치한다.

심지어 해리와 주연이 조금씩 서로 가까워지면서 처음 대부분의 인격을 차지했던 은호의 지분이 점차 줄어든다. 머리를 가린 채 키다리 아저씨처럼 주연을 지켜보며 좋아하던 해리가 주연의 아픔을 헤아리며 그에게 다가서면서 해리는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넓혀간다. 사랑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잊게도, 혹은 없던 자신도 만들어 낼 만큼 그 존재감이 큰 것일까?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운명같은 사랑이 있을까요?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스틸컷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스틸컷 ⓒ 쿠팡플레이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포스터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포스터 ⓒ 쿠팡플레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소설이다. 헤어진 지 8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를 두 작가가 각각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풀어낸 글이다. 두 연인이 재회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를 명소로 만들 정도로 이 작품은 소설에 이어 영화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츠지 히토나리 작가가 공지영 작가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의 후속작이다. 전작의 여주인공 아오이 그 이름의 의미가 푸른 색이었다면, 이번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여주인공 홍은 '붉은 색'인 것처럼 서로 대비되는 설정을 취한다.

반면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남자 주인공 아카타 준세이가 사랑의 상실을 자신의 직업으로 소환해 미술 복원가가 되듯이,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남자 주인공 아오키 준고는 자신이 잊어버린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소설가가 돼 기록으로 남긴다.

쿠팡플레이 시리즈 6부작으로 찾아온 드라마는 소설과 달리 5년 만에 다시 만난 최홍(이세영 분)과 베스트셀러 작가 사사에 히카리가 된 아오키 준고(사카구치 켄타로 분)의 만남으로 풀어낸다.

'운명 같은 사랑이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최홍은 무작정 일본 행을 택하고, 그곳에서 거듭되는 우연으로 아오키 준고를 만난다. 그리고 벚꽃이 피는 계절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준고는 홍에게 고백한다. 너의 변치 않는 운명이 돼 주겠다고.

그 운명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최홍은 지금까지 준고가 보지 못했던 표정과 목소리로 결별을 선언하고 떠났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르고, 이제 최홍은 '준고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입장이 됐다.

두 사람의 상징이 된 <보노보노>의 핏포와 도로리 피규어를 뽑기 위해 게임장 바닥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시절의 최홍. 드라마는 긴 퍼머 머리에 열정적인 모습으로 그 시절의 그녀를 표현한다. 하지만 준고에게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편지로 남기고 떠난 후 최홍은 생머리에 무채색 옷만 입는 얼음장 같은 여성이 됐다. 한결같던 남자친구와 상견례까지 마친 사이가 됐지만 그에게 최홍은 고맙다고 말한다.

소설처럼 최홍과 준고의 내레이션으로 1, 2화를 엮어간 드라마는, 현재의 두 사람과 과거의 기억을 씨실과 날실로 직조한다. 여전히 오늘처럼 과거가 그들의 현실 속에 촘촘히 직조돼 드러나며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헤어진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으르렁 거리는 은호와 현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글로 쓴 준고와 잊지 못할 줄 몰랐다는 홍.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단 나흘 간의 사랑이 만든 베스트셀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한 문장이다. 부박한 감정의 파고 사이에서 <나의 해리에게>와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이제는 촌스러울 수도 있는 진정한 인연과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사랑후에오는것들 나의해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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