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부타이(몽골어 수베데이, 1175-1248)는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칭기스칸이 가장 신임했던 맹장으로 유명하다. 몽골제국은 13-1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며 인류 역사에 남을 거대 정복 제국을 건설했다.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의 여러 명장 중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발한 전술과 잔혹함을 바탕으로 '전쟁의 신'이라는 찬사를 얻을 만큼 그 명성을 떨쳤다.

기록에 의하면 수부타이는 32개의 민족을 정복하고 65회의 대격전에서 모두 승리했다고 하다. 특히 유럽에서는 몽골제국의 유럽침공을 주도했던 인물로 수부타이에 대한 악명이 자자하다. 이러한 수부타이의 탁월한 전술은 당대를 넘어 먼 훗날 소련과 미국까지 전파되며 현대 군사전략의 기본 교리로 채택될 정도였다.

수부타이는 어떻게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을 뛰어넘는 전쟁의 신이 될 수 있었을까. 지난 1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9회는 '유럽침공, 징기즈칸의 개 수부타이' 편에서 수부타이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권용철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14세 군대에 합류한 수부타이

 방송 장면 갈무리
방송 장면 갈무리tvN

수부타이는 1175년 몽골계 부족의 하나인 우량카이족(훗날 오랑캐라는 단어의 어원) 출신으로 태어났다. 수부타이의 친형 젤메는 칭기스칸의 세력 초창기부터 최측근이었고, 1189년 수부타이도 형을 따라 14세의 나이로 칭기스칸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저는 쥐가 되어 거두어들이겠습니다. 검은 까마귀가 되어 밖에 있는 것을 모아 들이겠습니다. 부드러운 덮개가 되어 덮어드리겠습니다. 두툼한 바람막이가 되어 집을 가려드리겠습니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초원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던 칭기스칸은 소년 수부타이의 당돌한 투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에게 자신의 천막 문지기를 맡겼다. 오늘날로 치면 자신의 최측근에서 가장 중요한 경호 임무를 부여할 만큼 수부타이를 신뢰한 것이다. 자연히 수부타이에게는 군주인 칭기스칸을 바로 곁에서 보좌하며 전술지휘능력과 장수들과의 회의 등을 지켜볼 수 있게 됐고, 이는 군사적 경험에 관하여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엘리트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은 셈이다.

수부타이는 병사에서 장수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갔다. 1205년 메르키트 부족이 칭기스칸의 아내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칭기스칸은 보복에 나섰는데 그 선봉에 선 것이 당시 서른 살의 수부타이였다. 그는 병사들을 평범한 유목민으로 위장시켜서 메르키트족이 방심한 틈에 기습해 대승을 이끈다.

칭기스칸의 찬사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의 기발한 전략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그를 장수로 인정하게 된다. 다만 칭기스칸은 아직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수부타이를 걱정하며 종종 지나칠 정도로 잔소리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는 수부타이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중요한 임무를 맡겨야 했기에 한 애정어린 조언에 가까웠다. 실제로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이 주문한 임무들을 모두 척척 수행하며 가장 신뢰받는 장수로 거듭난다.

1206년 칭기스칸은 마침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대칸(大汗, 몽골어 xaah)의 지위에 오른다. 칭기스칸은 통일전쟁에서 특히 활약이 뛰어나고 충성스러운 8명의 장수를 사준사구(四駿四狗, 4마리의 준마와 충견)로 삼아 개국공신으로 우대했다. 사준은 보오르초, 모칼리, 보로올, 칠라올이었으며, 사구는 제베, 쿠빌라이아 함께 수부타이와 젤메 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개를 인간을 따르는 늑대로 생각하며 용맹하면서도 친근한 존재로 여겼기에, 개라는 지칭은 그만큼 충성스럽고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찬사였다.

칭기스칸은 몽골인들을 95개의 천호(千戶)로 나누고, 95명의 천호장(千戶長)을 임명했다. 31세의 수부타이도 천호장으로 임명됐다. 칭기스칸은 9만 5000명에 이르는 몽골군을 경기병 중심으로 재편하고, 강력하고 엄격한 법령을 시행하며 몽골을 전쟁에 최적화된 군사국가 체제로 확립시켰다. 이후 전 세계를 뒤흔들게 되는 '악마의 군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207년, 수부타이는 본격적으로 몽골 정복 전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을 보좌하여 서하를 정벌했고, 이어 1211년에는 금나라를 침공했다. 이 무렵 수부타이는 만호장으로 승격하여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의 반열에 올랐다. 몽골군은 4년간 파죽지세로 금나라를 공격하며 벼랑 끝에 몰아넣는다.

칭기스칸은 금과의 전쟁에서 점점 승기를 잡아가고 있던 상황에서 수부타이에게 또 다른 임무를 맡긴다. 서쪽의 이슬람 왕조였던 호레즘 제국(1077 ~ 1231, 현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대한 정벌이었다. 1218년 당시 칭기스칸은 호레즘과 우호 관계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규모 교역단을 파견했으나, 호레즘은 이들을 첩자로 몰아 살해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했다. 이를 항의하기 위하여 보낸 칭기스칸의 사신단마저 수염을 잘라 모욕을 주고서 쫓아 보낸다.

격노한 칭기스칸은 금나라와의 전쟁도 잠시 뒤로 미뤄둔 채, 호레즘에 피의 복수를 선포한다. 칭기스칸은 교역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성을 점령하고 사로잡은 성주의 눈에 뜨거운 은을 부었다. 이어 호레즘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함락하고 5만 명에 이르는 호라즘인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다.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함락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고 한다. 호레즘 제국은 몽골의 집요한 복수 끝에 결국 1231년 멸망한다.

악연의 시작

 방송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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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즘 정벌에 종군했던 수부타이는 도주한 무함마드 2세를 생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수부타이는 3만 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무함마드 2세를 쫓아 약 2000킬로미터(현 서울-울란바토르간 비행기로 4시간 거리)가 넘는 거리를 집요하게 추격했다. 이후 벌어지게 될 수부타이와 유럽 간 악연의 시작이었다.

무함마드 2세는 간발의 차이로 수부타이의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의 외딴섬으로 도주했다. 당시 배를 만들 기술이 없었던 몽골군은 더 이상 무함마드 2세를 추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부타이는 포기하지 않았고 칭기스칸에게 3년의 시간을 얻어 인근에 머물며 무함마드 2세를 압박했다. 1220년 한때 대제국을 호령하던 무함마드 2세는 결국 카스피해의 외딴섬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수부타이는 무함마드 2세가 사망한 것도 모르고 서쪽으로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몽골과 이전까지 별 연관이 없었던 인근 세력들에게는 뜻밖의 재난이 됐다. 1221년 수부타이는 추격전 도중에 길목에서 만난 조지아를 정벌했고, 목초지를 찾아 카스피해 북쪽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캅카스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러시아 영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1223년, 칭기스칸은 수부타이에게 전리품을 챙겨서 귀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인근의 도시와 부족들을 잔혹하게 약탈하는 것을 지켜본 러시아의 공국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본국으로 귀환하려던 몽골군을 선제공격한다. 이에 분노한 수부타이는 러시아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한 뒤 무려 12일간 일부러 도망가는 척 러시아 연합군을 유인하다가 칼가강에서 역습을 펼쳐 체력이 고갈된 러시아군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몽골군은 승전 이후 사로잡은 러시아의 귀족들을 묶어서 땅 위에 눕히고 널빤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식사와 잔치를 즐겼다고 한다. 널빤지 아래 깔린 사람들은 모두 질식하여 숨졌다.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적의 씨를 말리는 몽골군의 잔혹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1225년 수부타이는 몽골제국으로 귀환한다. 2년 뒤인 1227년에는 칭기스칸이 사망하고,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 칸이 그 뒤를 이었다. 56세의 노장이 된 수부타이는 우구데이 칸의 명에 따라 다시 금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1234년 금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몽골은 북중국을 장악한다.

1236년 우구데이칸은 바투와 수부타이에게 20만의 대군을 주어 본격적인 유럽 정벌을 지시한다. 명목상 총사령관은 우구데이칸의 조카인 바투였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노련한 부사령관인 수부타이에게 있었다. 61세의 노구를 이끌고 두 번째 유럽원정에 참전한 수부타이는 볼가강을 건너 러시아 북부의 공국들을 유린하며 승승장구했다.

수부타이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정복지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않고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학살했으며,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는 수부타이만이 아니라 몽골식 정복전의 특징이기도 했다.

특히 치열한 항전을 벌였던 키이우(키예프) 전투에서는 5만여 명의 시민 중 4만 8000명이 살해되었고 도시 건물의 대다수가 철저히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지역을 점령하고 정복민을 통치하는 것을 고려하기보다는, 그저 가는 곳마다 끝없는 파괴와 무자비한 학살만 일삼는 몽골군의 행보는, 당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몽골의 유럽 침공과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는, 칭기스칸 시절까지만 해도 유목민족 특유의 생존과 물자 확보를 위한 약탈에 가까웠다면, 칭기스칸 사후로는 정복을 위한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행보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바투는 러시아를 정벌한 이후 킵차크 칸국을 건립한다. 오늘날까지 러시아인들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았던 200여 년간을 '타타르의 멍에(1240-1480년)'로 칭하며 가장 지우고 싶은 역사적 수치로 여긴다. 서양인들이 몽골족으로 타타르로 칭하게 된 것은, 라틴어로 지옥을 의미하는 타르타노스에서 기원하여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부타이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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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부타이는 전투만이 아니라 심리전과 기만술에도 능했다. 수부타이는 1241년 레그니차 전투를 앞두고 폴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몽골군이 잔혹하고 점술과 마법에 능하다'고 믿었던 유럽인의 공포심을 역이용하여 괴소문을 퍼뜨리는가 하면, 말똥을 태워 악취와 연기를 일으켜 혼란을 유도했다.

또한 몽골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과를 확인하고 유럽인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전사자들의 귀를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또한 처형한 상대 지휘관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성벽 주위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압박을 가했다. 중세적 종교관을 바탕으로 전쟁에서도 신을 대리하여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유럽인들에게, 몽골인들이 영주와 리더를 본보기로 삼아 잔혹하게 살해하여 두려움을 자극하는 방식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수부타이의 몽골군은 헝가리와 폴란드를 정복하고 동유럽 일대를 평정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서유럽으로 가는 길만이 남아 있었다. 유럽 일대는 그야말로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거칠 것 없던 몽골의 서진이 갑자기 멈춘다.

몽골의 군주인 우구데이 칸이 1241년 사망하면서 몽골군이 유럽 원정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66세였던 수부타이의 마지막 참전 기록이기도 했다. 만일 우구데이칸이 사망하지 않고 수부타이의 유럽원정이 서유럽까지 계속됐다면 이후의 세계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지금도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수부타이는 이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248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중세인이자 평생 전쟁터를 돌아다닌 장군치고는 대단히 장수하며 천수를 다 누린 셈이다.

"펠트천이 바람으로부터 적을 보호하듯, 제가 칸의 모든 적을 막겠나이다"는 수부타이가 칭기스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남겼다는 서약이다. 수부타이는 칭기스칸에게 맹세한 서약을 뛰어넘어 한 명의 장군으로서 세계 역사의 판도를 뒤흔든 전무후무한 인물이 됐다.

수부타이는 피정복자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침략자이자 학살자에 불과했지만, 한편으로 역사적으로는 몽골제국의 유럽진출과 동서양 문화의 만남에 큰 영향을 지닌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수부타이가 시작한 유럽정복은 13세기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제패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또한 유럽은 몽골의 영향으로 더 이상 자신들만이 최고가 아니며 '더 넓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최초로 얻었다. 그리고 이는 200여 년 뒤에 시작될 대항해시대의 기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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