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1395-1446)는 조선 4대 국왕 세종대왕의 아내로 유명하다. 남편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었고, 아내인 소헌왕후 역시 모범적인 조선 왕비의 롤모델로 꼽힐만큼 후대까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성군의 현모양처'라는 어쩌면 지극히 가부장적인 관점에서의 찬사 이면에는, 시아버지에 의하여 친정 가문이 도륙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왕실 가족의 수많은 비극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던 한 여인의 깊은 한(恨)이 숨겨져 있었다.

9월 1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세종의 아내이자 조선 왕비의 롤모델, 소헌왕후는 왜 시아버지 태종의 타깃이 됐나'편이 그려졌다.

24살에 중전이 된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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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tvN 스토리


소헌왕후는 1395년 경기도 양주목에서 심온의 큰 딸로 태어났다. 소헌왕후의 가문은 청송 심씨로 조부인 심덕부는 고려 말의 재상이자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으며, 그 다섯째 아들인 심종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세종의 고모)와 혼인하여 왕실의 외척이 됐다. 이어 심덕부의 4남 심온은 딸 소헌왕후를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에게 시집보내니, 무려 2대에 걸쳐 왕실과 겹사돈을 맺을만큼 당대에 유력한 엘리트 가문이었던 것이다.

1408년(태종 8년), 14세의 소헌왕후는 두 살 연하였던 태종의 3남 충녕대군과 혼인했다. 어린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세종실록>에는 '왕후나 나서부터 정숙하고 완만하여 오직 덕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소헌왕후의 타고난 성품이 평온하고 인자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부는 평생 슬하에 무려 8남 2녀를 두었고 이중에는 훗날 조선의 국왕에 오르게 되는 장남 문종과 차남 세조도 있었다.

소헌왕후는 1418년 10월, 24세의 나이에 갑자기 중전(왕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국왕이던 시아버지 태종이 세자인 장남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3남이던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 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까지 물려준 것.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면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소헌왕후는 불과 몇 달 사이에 대군의 부인에서 세자빈을 거쳐 왕비의 반열까지 오르게 됐지만, 이는 훗날 그녀의 평온하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파란의 서막이 된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세종이 즉위하자 신하중 최고위 재상의 관직인 정1품 영의정에 올랐다. 국왕의 장인으로서 그에 걸맞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돈 태종의 의지였다. 이어 심온이 세종의 즉위를 승인받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는 수많은 이들이 심온을 따르며 전송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나온 사람으로 장인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자신이 왕비에 오르면서 친정 가문의 위세도 더욱 높아진 모습에 소헌왕후도 내심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종 즉위 원년인 1418년,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한다. 강상인은 본래 태종의 측근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병조참판을 맡고 있었다. 상왕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국정 경험이 부족한 젊은 국왕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병권(군사에 관련된 업무)과 주요한 국가중대사는 여전히 자신이 처결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강상인이 고의인지 실수인지 태종을 생략하고 세종에게만 중요한 군사 관련 업무를 보고한 사실이 들통이 났다. 태종은 이를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여 격분했고, 강상인과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유배형을 내렸다.

몇 달후, 태종은 이미 마무리된 듯하던 강상인 사건을 돌연 다시 꺼내들었다. 강상인의 태종 패싱 사건이 고의적인 음모였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배후가 있는지 재조사라는 엄명을 내린 것이다. 다시 끌려온 강상인은 처음에는 의혹을 부인했으나 모진 고문이 계속되자 결국 뜻밖의 이름을 꺼낸다. "심온이 군사가 한 곳에 모여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옵니다." 이는 세종의 장인 심온이 나라의 군권이 국왕 세종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뜻이었다.

격노한 태종은 심온이 강상인과 함께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심온은 곧바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사소한 보고 해프닝 정도로 보였던 사건이 순식간에 왕실의 사돈이자 유력가문까지 연루된 초대형 스캔들로 번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심온-강상인 사건을 두고 태종의 '외척 숙청' 작업을 위한 정치공작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왕비였던 신덕왕후(태종의 계모), 아내 원경왕후의 영향 등으로 인하여 외척 세력에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던 원경왕후의 처가 여흥 민씨 가문을 토사구팽했으며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를 모두 잔혹하게 처형하기도 했다.

이어 태종은 아들 세종의 즉위로 새로운 외척 가문이 된 청송 심씨 역시 경계했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려온 심씨 가문의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훗날 세종의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심온을 우대하고 영의정으로 삼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것은 심씨 가문을 방심시키기 위한 태종의 전략이었다. 그 틈에 태종은 강상인에게 가혹한 고문을 통하여 심온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씌우는데 성공했다.

심온은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이미 강상인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모두 대질조사도 없이 처형된 상태라 무고함을 밝힐 길이 없었다. 딸 소헌왕후도 사위 세종도 심온을 구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심온은 제대로 된 진상 조사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실록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심온의 사형이 결정된 다음날, 세종과 태종이 신하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는 것이다.

연회는 태종이 주최했던 것으로 보이며 세종은 여기서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했던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위로하고 비위를 맞춰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헌왕후에게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한가롭게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 더욱 가슴을 후벼파는 깊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심온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사실 당시의 세종은 태종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만한 실권이 없었다. 학계에서는 아버지 태종의 성격을 잘아는 세종이 노골적으로 반발할 경우, 처가만이 아니라 자칫 소헌왕후마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서 몸을 사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외척 숙청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공고하게 해주기 위한 아버지의 정치적 결단이었을 이해한 세종이 이를 동조하고 묵인했다는 평가도 있다.

왕비의 가족이 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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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모든 것을 체념한 심온은 역모 혐의를 인정하고 사사된다. 소헌왕후의 어머니와 여동생등 청송 심씨 가문의 여인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왕비의 가족이 천민으로 전락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최초였다.

하루아침에 역적의 딸로 전락한 소헌왕후의 운명 역시 바람앞의 등불이 됐다. 신하들은 소헌왕후의 폐비를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 세종은 침묵으로 거부 의사를 드러냈고 태종도 의외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태종은 자신의 외가인 여흥 민씨 가문도 척결했지만 정작 아내 원경왕후의 지위는 건드리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태종의 정치적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권에 위협이 될 외척을 제거하는 것이었을 뿐, 왕비까지 교체한다면 오히려 새로운 외척을 키우는 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정의 몰락, 역적의 가문이라는 멍에 속에 왕비로서의 입지가 바닥까지 추락한 소헌왕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소헌왕후는 오히려 묵묵히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며 왕비로서의 본분과 법도를 지키는데 전념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헌왕후의 초인적인 자기 절제에는 타고난 후덕한 기질과 책임감있는 성품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만일 자신마저 흠을 잡혀서 폐비가 될 경우 가문의 복권이 영원히 불가능해진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22년 시아버지이자 원수였던 태종이 사망한다. 온전히 남편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면서 소헌왕후는 내심 친정 가문의 억울한 누명도 벗겨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세종은 심온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끝내 지시하지 않으며 아내의 마음에 또 한번 비수를 꽂고 만다. 청송 심씨 가문은 신하들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세종시대에는 복권되지 못하고, 아들인 문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세종으로서는 태종의 결정을 직접 부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기 전에 군주로서 아내의 한보다는 '왕실 질서'를 지키는데 무게를 두어야 했던 것이 세종의 입장이었다. 백성과 역사에서는 성군으로 기억되는 세종이지만, 정작 소헌왕후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운 남편이 아니었을까.

한편 세종이 소헌왕후의 속을 썩인 것은 친정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국왕중에서도 여성편력이 심한 편이었다. 후궁만 10명에 이르렀으며 그 외에도 여러 궁녀들을 수시로 가까이했다. 세종의 자녀만 무려 18남 4녀에 이르렀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소헌왕후는 남편의 여인을 한번도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궁의 자식들까지 덕으로 포용하며 비빈들이 모두 소헌왕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26년 2월 15일에는 세종이 잠시 궁궐을 비운 틈에 수도 한양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소헌왕후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남편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나서서 조정을 통솔하며 화재 대처를 주도했다. 보고를 받은 세종도 소헌왕후를 신뢰하여 모든 결정을 일임했다. 소헌왕후의 신속한 대처로 화재는 진압되었고 조선 왕실의 종묘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운다. 소헌왕후가 단순히 남편을 보필하는데만 치중하던 수동적 현모양처가 아니라,나라의 큰 위기를 수습할 정도로 능력과 강단도 갖춘 여성 리더의 자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종도 이러한 소헌왕후를 예로서 존중했다. <세종실록>에는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날 때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나시니 그 공경하고 예하심이 이와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군주인 세종이 왕비 소헌왕후를 대하는 공경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종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슴 아픈 비극을 겪어야 했던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소헌왕후에게 부부관계 이상을 넘어선 '동지애'를 느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자한 소헌왕후의 박복한 마음고생은 말년까지 계속됐다. 시아버지와 남편에 이어, 소헌왕후에게는 '며느리 복'도 없었다. 세자 시절 아들 문종의 세자빈었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는 갖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를 일으킨 끝에 연이어 폐출된다. 또한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은 방탕한 기행으로 소헌왕후와 세종의 속을 여러 차례 썩이기도 했다.

1444년 50세가 된 소헌왕후는 친정 어머니 안씨와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이 병으로 몇 달 사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오랫동안 숱한 비극을 묵묵히 견뎌온 소헌왕후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줄줄이 떠나보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눕게 되며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다. 이에 문종을 비롯한 소헌왕후의 아들들은 자신의 생살을 불로 지져가는 연비(燃臂) 의식을 감수해가며 어머니의 쾌유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1446년 3월 24일,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소헌왕후는 52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세종은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내의 무덤을 만들면서 미리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두었고, 이는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오직 세종이 유일하다. 현재 경기도 여주에 위한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히며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된다. 세종에게 죽어서도 영원히 함께 유일한 반려자는 오로지 소헌왕후 뿐이었던 것이다.

역사는 세종이 남긴 수많은 업적들을 기억하지만, 소헌왕후의 존재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어쩌면 세종이 '좋은 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옆에서 훌륭한 조력자이자 남편의 치부조차 이해하고 포용해준 소헌왕후의 한없는 희생 덕분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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