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티빙
우씨의 대담한 도박은 고구려를 그 같은 내전 직전 상황으로 몰고 갔다.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지 않아 고발기가 3일 뒤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고구려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발기의 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씨와 고연우의 제휴를 비판했던 고발기는 후한(후기 한나라) 요동태수인 공손탁과의 야합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이는 고구려의 국운에 악영향을 끼치는 단계로 발전했다.
외세의 힘을 빌려 태왕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심한 고발기는 자신이 관할하던 요동 땅을 공손탁에게 넘긴 뒤 3만 군대를 빌려 고구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고발기는 전쟁에서 패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본 것은 공손탁이다. 고구려 왕실의 내분 덕분에 그는 손쉽게 요동 땅을 차지했다. 우씨의 대담한 결혼이 고발기의 고구려 배신으로 이어지더니 고구려 영토 상실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런 난리를 겪으며 시동생과 결혼하고 왕후 지위를 유지한 우씨는 그 뒤에는 시동생의 여자 때문에 난리를 겪었다. 우씨의 몸에서 후계자를 얻지 못한 산상태왕은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렸다. <삼국사기>는 산상태왕이 우씨와 혼인한 지 11년 뒤인 208년에 주통촌(酒桶村)에 사는 스무 살 전후의 여성을 가까이했다고 알려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씨는 병사들을 보내 여성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여성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여성이 산상태왕의 아이를 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씨의 밀명을 받은 병사들은 태왕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여성을 감히 해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은 아이를 낳았고, 산상태왕은 교체(郊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우씨는 이 아이 때문에도 속앓이했다. 아이를 미워한 나머지, 끊임없이 괴롭힘을 가했다. 아이가 태자가 된 뒤에도 괴롭혔고, 227년에 태왕이 된 뒤에도 괴롭혔다.
우씨는 234년에 생을 마감했다. 눈을 감기 전, 그는 37년 전의 형사취수혼을 후회하는 말을 남겼다. "내가 절개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국양왕(고국천왕)을 지하에서 본단 말이냐"라고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러면서 우씨는 자신을 산상태왕 곁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내 시신을 계곡이나 구덩이에 버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동천태왕은 그 유언대로 해주었다. 그러면서 고국천태왕의 무덤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였다. 이 무덤을 일곱 겹의 소나무로 병풍처럼 에워싸는 식목 공사였다. 이 공사는 무속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무속인이 동천태왕에게 진언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부인이 동생과 함께 묻히는 것을 본 고국천태왕은 무속인에게 나타나 격한 분노를 표시했다. 무속인에게 나타난 고국천태왕은 자신이 전날 우씨와 싸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무속인에게 "낯이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라며 "물건으로 나를 가려 주게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무속인이 들려준 이 부탁에 따라 동천태왕이 고국천태왕의 무덤을 소나무로 가려주는 공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