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수십 년 함께 살아온 가족이라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상상도 하지 못한 비밀을 우연히 발견하곤 한다. 연애감정은 더욱 그렇다. 사랑의 열병에 빠져 저돌적으로 직진하지만, 사실 상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을 경우가 허다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곧 위기와 파국으로의 롤러코스터가 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내 앞의 상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함께 풍경을 볼 것인가일 테다.

요즘에 사실상 사회적 고립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은둔형 외톨이'가 아니라도 대외적인 공식적 측면 외에 일체의 교류를 차단하거나, 혹은 지극히 선택적·제한적으로만 행하려는 태도다. 물론 한국 사회가 지난날 과도하게 집단주의적 행태를 보인 반작용으로 이제야 합리적 개인주의가 태동하는 것으로 진단도 하지만, 사회적 존재가 그 본원적 속성을 배제하는 건 장기적으로 썩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타인과의 소통이 서툴러진 이들은 어떻게 관계를 재건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에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

우연히 깃든 떨리는 가슴과 그 방해물, 바로 자신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미국 서북단, 태평양 연안 오리건주 어딘가 소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프랜'은 말수가 적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회사에서 그가 맡은 일도 스프레드시트 정리, 출납 관리 등 타인과 팀플레이가 아니라 제 할 일 꼼꼼하게 수행하면 될 일. 크게 직장 동료들과 모나지 않게 생활하고 있지만, 퇴근 후에는 별도로 교류하지 않고 혼자 살기엔 좀 큰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다.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간다고 봐도 좋겠다.

그런 프랜의 조용한 일상은 누군가에겐 간섭받지 않고 자기 시간을 확보하는 이상적인 직장인의 삶이지만, 화면 속 그의 시간은 공허함에 가깝다.

그가 유일하게 자극을 받고 흥분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자기 죽음을 상상하는 찰나다. 꿈속에서 그는 어딘가에 시체로 쓰러져 있거나, 무시무시한 뱀이 집안으로 기어오는 상황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 따로 설명되진 않지만, 그렇게 프랜은 자신만의 은밀한 상상을 할 때만 희열을 느낀다.

회사에서 오래 근속한 직원이 퇴사하고, 신입사원이 입사한다. 로버트란 남자다. 사무실 동료들이 환영인사를 전할 때, 무뚝뚝해 보이는 프랜의 메시지가 그를 웃게 만든다. 나쁘지 않은 첫인상이다.

비품 관리를 담당한 로버트와 업무 관련 메신저 연락을 자주 하던 프랜은 근무 내내 그를 신경 쓰게 된다. 그런 프랜에게 로버트는 함께 영화를 보자고 권한다. 달리 할 일도 없기에 프랜은 요청을 수락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늦은 저녁 시간, 자연스럽게 둘은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어느새 데이트가 돼 버렸다.

사무실에서 맡은 일만 충실하던 프랜은 근무 내내 로버트의 동태를 살피고, 메신저로 교감을 이어간다. 외지에서 온 로버트와 집에서 별 대외활동을 않는 프랜은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낸다. '썸'이 이어지면서 둘은 점점 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프랜은 오랫동안 타인 앞에서 갑옷을 벗은 적이 없다. 로버트는 프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오해가 쌓이면 의도치 않게 서로 상처 주게 마련. 프랜은 미래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이 자신의 그런 태도라는 걸 깨닫는다.

미국 독립영화 스타일의 정수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한국 독립영화와는 사뭇 다른 미국 독립영화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웅적인 주인공 혹은 굵직한 사건 중심으로 굴러가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문법과도 다르다.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 그리고 주류영화에서 배경으로만 그려지는 일상 속에 깃든 다양한 예상 밖 단면을 조명한다. 삶과 지역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함께 획일적이지 않은 열린 사고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미국 독립영화 발굴과 등용의 메카로 꼽히는 '선댄스 영화제'가 상징하는 영화적 경향이라 해도 좋겠다.

물론 그런 경향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현미경처럼 고찰하는 데 그치진 않는다. 상업영화가 편의점 장면을 묘사할 경우 그저 주인공의 행위에서 도구적 배경으로 물건을 산다, 혹은 사건의 현장이 된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독립영화의 시선으로는 계산대의 점원이 점원끼리 또는 손님과 나누는 대화 속에 숨은 기류나 뼈대 있는 농담이 두드러질 테다. 지나가는 말 속에서 영화 속 시공간 특징이 압축되고 전개를 풍성하게 해줄 상황 배경이 암시된다. 그런 함축적인 표현과 밀도의 유지 같은 기본기를 눈여겨본 메이저 스튜디오가 인재를 발굴해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온 셈이다.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역시 선댄스 영화제의 총아로 주목받은 작품이자, 그런 미국 독립영화의 개성을 표상하는 작품이다. 데이지 리들리가 본 작품에서 주연과 제작을 겸하며 프랜 역을 맡았다.

우리에겐 <스타워즈> 시퀄의 진 주인공 '레이' 역으로 알려진 그는, 이후 블록버스터보다는 연기력이 요구되는 중소규모 영화에 주로 활약하며 제작자 경력도 쌓아갔다. 광선 검을 휘두르며 출생의 비밀을 안은 전형적인 영웅으로 배우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깜짝 놀랄 연기 변신이다(물론 이는 <스타워즈> 이후 10년 넘게 다양한 배역으로 활약한 배우에 대한 직무유기의 고백이기도 하다).

프랜의 과거사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가족이 있지만, 영화 내내 그가 지인과 연락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 그런 주인공의 과거사를 어떻게든 배치해 궁금증을 풀어줄 테지만, 이 영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프랜 같은 인물은 사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고 어쩌면 관객 자신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영화 속 주인공은 마치 자신들의 자화상처럼 받아들여질 테다. 타인과 관계에 애를 먹는 나머지 보호색이 발동해 외부에 철벽을 쳐놓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존재. 외로운 그들은 어떤 돌파구를 꿈꾼다. 프랜에게 그 수단은 실제 결행하진 않지만 늘 상상하는 자신의 최후다.

하지만 기존 입장을 바꾸게 할지 모를 상대를 만났다. 영화 취향도 다르고 안 맞는 점이 제법 있지만, 자신의 숨겨진 장점을 발굴해 주는 데다, 소유하거나 독점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로버트가 마음에 꽤 든다.

관계를 진전하려면 벽을 허물어야 한다. 최종 단계에서 프랜은 겁을 먹고 최후 방어본능이 작동한다. 이는 상대를 배척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프랜은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는다. 최악의 주말이 지난다. 같은 직장에 다니기에 월요일 아침이 되면 둘은 재회를 피할 수 없다. 프랜에게 결단이 남았을 뿐이다.

곱씹을수록 풍부한 맛 보장되는 성장드라마의 매력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영화는 전형적인 러브스토리를 고수하지 않는다. 프랜과 로버트는 서로 호감을 보이지만, 둘은 10대의 첫사랑이나 20대의 정열 로맨스와는 다른 성인의 사회적 관계를 의식하며 행동한다. 프랜은 중세 기사의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채 최소한의 '공식적' 사회생활 외에 일체를 거부한다.

로버트는 대도시 생활에서 상실을 안고 오리건주 소도시로 이직해 왔다. 둘은 각자의 상황 탓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관계를 이어가려면 껍질을 부수고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 두려운 과정이 지극히 섬세한 터치로 그려진다. 작은 동작 하나, 행동 하나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면 대수롭지 않은 장면마다 그들의 감정선이 느껴질 테다. 그런 묘미로 승부수를 던진다.

감정의 곡선을 풍부하게 살려주는 건 무대가 된 오리건주의 자연풍경이다. 미국에선 드물게 사계절 변화가 뚜렷하고, 숲과 바다가 보전된 지역이기에 세트를 세운 양 제작진이 원했던 모든 게 갖춰져 있던 셈이다.

주인공들은 첫 만남에서 지역 명물 도넛을 추천받고 첫 데이트 식사로 도넛을 먹는다. 오리건주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도넛 명소다. 평범한 미국인들이 간단한 식사로 입에서 떼지 않는 도넛 중에도 전국 최고를 다투는, 마치 대전 성심당 대표 메뉴 소개 같은 순간이 배경으로 스친다.

로버트가 곁들이는 음료로 권하는 건 아이리시 커피다. 위스키와 커피를 배합한 주류 베이스 음료다. 이름에서 전달되듯 아일랜드에서 유래한 음료를 함께 마신다. 프랜 역의 데이지 리들리의 혈통을 떠올리면 묘하게 이해와 배려의 추천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겐 별 것 아닌 찰나지만, 뿌리 깊은 미국 내 민족갈등과 연결하면 촌철살인 격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 사무실은 자체로 작은 다문화 사회다. 인도계, 동아시아계, 중동계, 라틴계가 골고루 섞여 격에 없이 어울리지만, 편견과 오해 역시 잔류한 상태다. 그런 깨알 같은 묘사가 오리건주 배경을 그저 풍경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까지 녹여내 활용한다. 태평양과 맞닿은 지방이란 특성으로 회식 만찬에서 주역을 담당하는 해산물이나 지역 특산물 치즈에 대한 예찬도 빼놓을 수 없다. 그야말로 '풍물지' 묘사가 끊이지 않는 잔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프랜이 로버트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으로 성숙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예전에는 그저 공식적으로만 대하던 퇴사한 동료와의 재회에서 프랜은 예전과는 다르게 그의 뒷사정까지 포착하고 공감하는 변화를 드러낸다. 그리고 어렵사리 로버트에게 사과의 의지를 피력한다. 우리가 얼마나 일상에서 놓치거나 외면해온 부분들인가.

물론 너무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이지만, 도망친다고 해결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시작이 반인 것처럼, 어떻게든 '대면'하면 결과는 나오는 법이다. 프랜이 결단한 것처럼.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작품정보]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Sometimes I Think About Dying
2023 미국 드라마/로맨스
2024.09.04. 개봉 93분 12세 관람가
감독 레이첼 램버트
출연 데이지 리들리(프랜 역), 데이브 메르헤예(로버트 역),
수입/배급 ㈜디오시네마

39회 선댄스 영화제 US드라마틱 경쟁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포스터 이미지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포스터 이미지 ⓒ (주)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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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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