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ndrea Mussolini, 1883-1945)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북한의 김일성, 스페인의 프란시스 프랑코 등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2차대전의 전범 중 하나로 악명높은 인물이다. 그가 창시한 파시즘(Fascism, 결속주의)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효율적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사상의 일종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는 어떻게 파시즘이라는 광기에 휩싸이며 무솔리니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탄생시키게 됐을까. 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선 '로마 황제를 꿈꾼 파시스트 무솔리니' 편을 통해 한 독재자의 탄생에서 비참한 몰락까지의 여정을 조명했다. 문준영 대구 경북과학기술원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반항적 성격의 무솔리니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 tvN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동부 로마니아 지방의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였던 아버지 알레산드로 무솔리니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로사 무솔리니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솔리니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고, 아들의 이름도 멕시코의 혁명 지도자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에서 따왔을 만큼 열렬한 신봉자였다.

무솔리니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 불과 6세 때 사소한 시비가 붙어 친구를 돌멩이로 무자비하게 폭행해 피투성이로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무솔리니는 고집불통에 반항적인 싸움꾼 기질이 강했고 주머니에는 항상 칼을 소지하고 다녔으며, 교사들에게 혼이 나도 전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의외로 문제아 기질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잘했던 무솔리니는 1901년 18세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사가 된다. 하지만 본성은 어딜 가지 않아서 무솔리니는 교사가 된 후, 걸핏하면 학생들에게 폭언과 체벌을 가하는가 하면, 툭하면 술에 취해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무솔리니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발을 산 끝에 불과 1년 만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무솔리니는 사회당 지역신문의 편집인으로 근무해 '언론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28세가 된 1911년에는 이탈리아-리비아전쟁에서 '참전 반대파'에 서서 여론을 선동하며 총파업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징역형을 살게 됐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런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입장을 180도 바꾸어 전쟁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무솔리니는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가 국제적 위상과 영토 확장을 얻고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유로 들었다. 사실 그 본심엔 무솔리니가 참전 운동을 계기로 언론인을 넘어서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야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무솔리니는 사회당 신문의 편집장 자리에서 사임하고 사회당에서도 제명당한다.

'민족주의' 언급한 무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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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 tvN


무솔리니가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하기 위해 끌어들인 새로운 사상은 '민족주의'였다.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무솔리니는, 어제까지 한편이었던 사회주의를 맹렬하게 반대하고 증오하는 입장으로 돌아선다. 무솔리니에게 사상이란 단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탈리아는 1차대전에서 참전해 연합국의 편에서 서서 승전국이 됐다. 하지만 전후에는 예상과 달리 연합국들 사이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애초 약속받은 배상금과 영토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고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한다. 자연히 이탈리아에서는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이탈리아의 혼란한 분위기를 틈타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무솔리니였다. 그는 '이탈리아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강조하며 국가의 통합과 강화를 내세웠다. 대중의 분노를 등에 업은 무솔리니의 선동은, 당시 이탈리아인의 마음을 대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무솔리니는 이때부터 파시즘이라는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의 기원은 파쇼(리토리오)라는 상징물로, 본래는 로마제국 시대 집정관 등 고위공직자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들고 다니던 도구에서 유래했다.

파시즘의 사상적 핵심은 '결속과 단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하는 체제를 의미하며, 우리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파시즘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독재자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 최적화된 사상이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전투동맹'을 결성하고 밀라노를 거점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파시스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또한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이라는 군사 조직이자 정치깡패 집단을 양성해 사회주의 세력을 비롯한 파시즘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적대하며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들은 집회를 습격하는 것은 물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급속도로 세력을 키운 무솔리니는 1921년 11월 7일 '파시스트 국민당'을 건립했다. 파시스트당은 로고의 중심에 파쇼를 새겨넣으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1922년 10월 18일에는 아예 쿠데타를 선포하며 전국에서 집결한 6만여 명의 검은 셔츠단을 집결시켜 '로마 진군'을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총리의 계엄령 선포와 진압 요청을 무시하고, 무솔리니와의 타협을 선택했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정작 겁 많았던 무솔리니는 당시 로마 진군이 실패할 경우 해외 망명을 위해 밀라노에 대기하고 있었다. 예상을 깨고 쿠데타가 성공하자 무솔리니는 뒤늦게 실제로는 본인이 참여한 적도 없는 로마 진군에 앞장선 척 조작된 영상 촬영에 나서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파시즘 국가의 탄생

1922년 10월 30일, 이탈리아에 무솔리니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출범한다. 세계 최초로 이탈리아에 '파시즘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무솔리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거법을 개정해 선거에서 1등을 한 정당이 국회 의석의 2/3를 차지하는 승자 독식법을 도입했다. 하나의 정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원하는 법을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고 이를 바탕으로 1924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다.

무솔리니의 선거법 개정과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 출신 의원이었던 자코모 마테오티는 파시스트들에게 납치돼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솔리니는 1925년 1월에는 의회 시정연설에서 파시스트 국민당의 '완전한 독재권'을 선언하며 파시스트를 제외한 모든 정당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1929년 열린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단독 출마한 파시스트당이 형식적인 찬반투표 끝에 의석 100%를 모두 석권하며 완벽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반대파를 모두 절멸시키고 이탈리아를 장악한 무솔리니는 자신을 수령을 의미하는 '두체(Duce)'라는 표현으로 부르게 했다.

무솔리니의 다음 목표는 '로마 제국 부활' 프로젝트였다.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분으로 스파치오 비탈레(이탈리아어로 생존권)' 정책을 표방하며 실제로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옛 로마제국의 영토들을 회복하겠다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무솔리니는 그 첫걸음으로 1935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다. 심지어 강력하게 저항하는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국제사회에서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를 살포해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비윤리적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국제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탄하며 무기수출 금지와 경제 제재를 결의했다. 이에 반발한 무솔리니는 1937년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무솔리니의 돌파구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공공연하게 롤모델로 여겼을 만큼 열렬한 추종자였다.

무솔리니는 '쇼맨십과 이미지 연출'에 있어서 선구적인 독재자로 꼽힌다. 무솔리니는 자신을 로물루스, 카이사르, 스키피오 등 고대 로마의 건국자 및 영웅들과 동일시해 그들의 행적과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즐겼다. 또한 무솔리니는 '루체'라는 선전기록 영화 제작회사를 만들어 자신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다. 오늘날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역시 그 시작은 무솔리니의 후원으로 정치적 선전을 위해 기획됐다는 사실은 유명한 흑역사다.

무솔리니의 선동 방식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 tvN


이러한 무솔리니의 선전과 선동 방식은 후대의 독재자들도 그대로 따라 하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열혈 팬이 바로 히틀러였다. 그는 무솔리니를 '나치의 귀감'으로 치켜세웠고, 연설이나 제스츄어 등 무솔리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그대로 모방했다. 실제로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독재자는 미디어를 활용한 선동술, 쿠데타로 인한 권력장악, 폭력을 통한 독재체제 구축 등 대부분의 행보가 판박이처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내심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름대로 교사와 언론인을 지낸 무솔리니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부했기에, 고등학교도 중퇴한 히틀러를 은근히 무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독일이 유럽을 휩쓸며 세력이 점차 커지자, 무솔리니는 독일과의 군사적인 동맹이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1939년 5월 22일,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강철 조약'이라는 이름의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그리고 조약 체결 4개월 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특유와 기회주의적인 행보와 무능함으로 히틀러와의 신뢰에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독일-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처음에는 참전에 소극적이다가 독일의 승기가 굳어지자 뒤늦게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며 히틀러의 분노를 자아냈다.

또한 로마제국 부흥에 심취했던 무솔리니는, 유럽 강대국들이 전쟁의 참화에 휩쓸린 틈을 타 그리스와 아프리카의 이집트 등을 침공해 어부지리를 얻으려 했다. 정작 이탈리아군은 전쟁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사막에 승전기념비 제작용 대리석을 수송할 것을 명령하는 기행을 벌이며 연합군의 비웃음을 샀다.

또한 1940년 10월 28일에는 굳이 '로마진군' 성공 기념일에 맞춰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예상과 달리 무려 6개월이나 고전하며 망신을 당하자 히틀러의 지원을 받고 나서야 겨우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뒷목을 번번이 잡게 하는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이집트 전선에서는 독일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만다. 무솔리니는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계속해서 히틀러에게 구원을 호소했고, 히틀러는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계속해서 전선만 늘려놓는 '금쪽이'가 된 무솔리니에게 크게 격분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무시

히틀러는 이때부터 무솔리니를 무시하고 아랫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며 독소전쟁이 개막하자 강철조약에서의 협의도 무시하고 무솔리니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이번에도 독일의 승리를 예상하고 소련에 20만의 대군을 자청해서 파병하여 승전국 지위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오판을 벌였다. 정작 독일군은 이탈리아 병사들을 사실상 소모품에 불과한 방패막이 역할로만 활용했다. 결국 소득 없는 전쟁 장기화로 경제적-인적 손실만 커지면서 이탈리아 내부에서 무솔리니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간다.

1942년 12월, 미국의 참전은 무솔리니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미국이 가세한 연합국은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 중 '히틀러의 연약한 아랫배'로 불리던 최약체 이탈리아를 먼저 무너뜨리기로 한다.

연합국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불리한 상황에 몰려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에 바빴다. 침공 한 달 만에 전세는 연합국에 기울어졌고,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총리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직후 체포되어 구금당한다. 21년간의 철혈 독재가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솔리니를 끌어내린 것은, 바로 그동안 그에 빌붙어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던 파시스트당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돌려서 연합국과 협상의 도구로 삼으려고 했다. 무솔리니를 추종하던 파시스트들과 검은 셔츠단도 침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의 영광을 내세웠던 무솔리니는,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처럼, 자신이 키워주고 아낀 파시스트들에게 배신당한 셈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몰락 소식을 듣자 곧바로 어제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를 공격해 북부 일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무솔리니는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에 세운 파시스트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의 수령으로 임명돼 이제 완전히 히틀러의 부하로 전락했다.

전세는 이미 연합국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연합국의 공세가 거듭되면서 파시스트 공화국의 운명도 벼랑 끝으로 몰리자 무솔리니는 이번엔 애인과 함께 스위스로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독재자에게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1944년 4월 27일, 국경 일대에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비정규군 요원이던 파르티잔들에게 생포를 당한다. 이튿날 무솔리니는 분노한 파르티잔들에게 무참하게 총살을 당했고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진다. 한때는 황제를 꿈꾸던 독재자의 비참하고도 허무한 최후였다.

사후 무솔리니에게 원한을 가진 이탈리아 시민들은 그의 시신에 침과 욕실을 퍼붓고 두들겨 패거나 총을 쏘기도 했다. 무솔리니와 애인의 시신은 거꾸로 주유소에 매달렸고, 특히 무솔리니의 얼굴은 얼마나 심하게 훼손됐는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3월 30일에는 무솔리니와 '애증의 콤비'였던 히틀러 역시 전세가 기울이며 베를린의 한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두 독재자의 최후와 함께 '인류 최악의 전쟁'이던 2차대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역사는 거짓말 위에 세워졌다.' 역사학자 페데리코 펜첼스타인의 격언이다. 무솔리니의 인생은 한 지도자의 무책임한 독선과 몽상이 나라를 어떻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였다. 한편으로 그러한 독재자의 출현을 막지 못한 사회 역시 결국 큰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엄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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