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2헤르츠 고래들> 스틸컷
해피송
일본 규슈의 동쪽 바닷가에 있는 오이타현의 작은 마을. 젊은 여성 '키코'가 외딴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선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이 떠돈다. 키코의 집수리를 위해 방문한 건설업자 '무라나카'와 조수도 낯뜨거운 소문을 언급한다. 듣고 있자면 모욕적인 수준의 음해 내용이지만, 정작 키코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찬찬히 사실을 설명한다. 마을에 연고가 있긴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가 이 마을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사연 가득한 눈빛과 표정의 진위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전거를 타고 볼일을 보러 나갔던 키코는 폭우를 만나고, 과거의 상처 때문인지 빗길에 쓰러진다. 얼핏 보면 여자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긴 머리를 치렁치렁한 어린 소년이 그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비에 푹 젖은 둘은 키코의 집으로 향한다. 소년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온수 목욕을 시키려던 키코는 아이 몸에서 심상찮은 흉터를 발견한다. 소년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키코는 소년의 사정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소년이 자신에게 구조요청을 보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의 키코는 과거에 자신이 처했던 상황, 그리고 본인이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던지던 무언의 구조요청을 들어줬던 사람을 떠올린다. 안고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키코가 세상에 절망해 자포자기 심정으로 도로에 뛰어들 때 생명을 구해줬고, 재기의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영혼의 짝'처럼 자신이 바라던 바를 이해하고 늘 행복을 기원해줬었다. 이제 키코는 안고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구조요청을 보내는 이 소년의 호소를 이해하고 구출할 것을 결심한다.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말이다.
영화는 2021년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에 빛나는 동명의 원작소설을 화면에 옮겼다. 작가 마치다 소노코는 청소년 시절 소설가를 꿈꾸며 습작을 쓰곤 했지만, 고교 졸업 후 취업과 결혼이라는 일반적인 궤적을 거치며 소시민으로 살던 중 서른이 다 되어 전업주부에서 작가의 길로 탈주를 감행했고, 이후 인기 소설가의 길을 걷는 중이다. 첫 장편인 원작처럼 문득 스쳐 지나갈 법한 이들의 깊은 사연을 통해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필력은 정평이 나 있다.
(원작과) 영화는 ① 소년을 구조하려는 현재의 키코 + ② 과거에 삶을 포기하려던 키코에게 일어났던 일들의 회상이 교차해가며 전개된다. 키코가 겪었던 지옥 같은 과거 시절과 그를 수렁에서 끌어내 준 생면부지의 존재 안고의 인연이 3년 전 시점으로, 그리고 키코가 안고와 함께 재회한 학창시절 친구 미하루 덕분에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던 중 만나게 된 분에 넘치는 첫사랑 니이나와 관계가 출발하던 2년 전 시점, 마지막으로 어렵게 쌓아 올린 새 삶이 위기에 처하며 삶에서 두 번째 파국을 맞게 된 1년 전 시점이 차례로 돌아온다.
이를 통해 키코가 왜 불쌍하긴 하지만 책임질 이유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키코의 현재 삶을 더 힘들게 할 위기를 감수하며 소년을 구조하려 하는지 관객이 사연에 공감하게 만든다. 만약 과거 회상 장면이 순차적으로 투입되지 않는다면, 과거의 상처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끼는 주인공이라는 단조로운 신파와 동정의 인간 드라마로 그치고도 남을 내용이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으로 명망 높은 원작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년을 마치 야생처럼 방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학대를 일삼는 마을 제일의 미녀 코토미를 바라보며 키코는 자신을 몰아붙이던 엄마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딸을 본능적으로 사랑하지만, 딸 때문에 본인 연애가 방해받는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학대와 집착을 반복하던 엄마와 자식을 '벌레'로 간주하는 코토미는 애정 결핍을 폭력적으로 자식에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거울처럼 반영된다.
고작해야 20대 중반의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키코가 대도시에서 멀리 동떨어진 규슈 바닷가 마을로 와 혼자 살게 된 사연 역시 과거 회상 속에서 밝혀진다. 자신을 구원해 준 안고에게 키코는 당연히 사랑을 느꼈지만, 정작 안고는 그의 애정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하면서 키코는 마치 신데렐라처럼 자신이 일하던 직장의 후계자 니이나에게 구애를 받고 사랑에 빠진다.
키코에게 푹 빠진 니이나는 유독 안고를 경계하며 그의 뒤를 캔다. 소유욕의 발로다. 그런 집착은 키코와 안고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그런 과거를 거쳐 키코는 할머니가 말년에 귀향했던 이 마을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마을 남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게이샤 출신 할머니가 주민들의 시기 대상이 된 것과 본인의 의심을 받는 처지도 매한가지다.
"딱 한 명,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어"
▲영화 <52헤르츠 고래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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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는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떨어질 걸 감수하며 소년을 구조하기로 결의한다. 물론 과정은 순탄치 않다. 소년의 엄마에게 모욕과 폭행을 당하고, 달리 직업도 평판도 없는 그가 생면부지 소년을 책임지기란 난관의 연속이다. 어떻게든 소년을 보호해줄 피붙이를 찾지만 허사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소년을 향한 모친의 학대는 심해져 간다. 그에게 아이는 아이돌 꿈꿀 정도로 잘나가던 인생을 망친 원망의 표적일 뿐이다.
그럴수록 키코는 안고가 자신을 위해 베풀어준 도움을 마치 그의 환생처럼 보이는 소년을 지키고자 단호하게 임한다. 그는 안고가 과거 자신에게 정말 너무 힘들 때 들으라며 선물해준 '52헤르츠 고래'의 소리를 이제 '52'라 이름 붙인 소년에게 선물한다. 둘은 그 소리로 공명한다. 이제 '52헤르츠 고래'는 혼자가 아니다.
키코가 보낸 절박한 52헤르츠 소리를 들어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키코는 정작 상대가 52헤르츠로 소리 없는 절규를 보낼 때 온전히 수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지울 수 없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떠안은 채 도망치듯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는 그저 공허하게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다 운명의 소리를 다시금 듣게 된 것이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자신은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데 말이다.
절대로 과거의 실책을 되풀이할 순 없다. 키코는 입술을 깨물고 소중한 이에게 받은 헌신과 사랑을 기꺼이 되돌려주고자 결의한다. 그 분투의 여정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 그 험난한 여정을 밟아간 덕분에 소년은 물론 본인조차 진정한 구원과 새로운 출발로 인도해준다. 세상의 외톨이던 52헤르츠 고래가 또다른 52헤르츠 고래를 만났고, 절대로 헤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영화는 딱 그런 이야기다. 전형적인 일본 치유 계열 끝판왕 격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이타현 바닷가 마을의 산과 바다가 만나는 아름다운 풍광, 도시라면 느끼기 힘든 시골 공동체의 처음 봤을 때는 작은 사회의 폐쇄성이 두드러졌지만, 친해지면 소탈하고 인정 많은 분위기가 어우러진다. 무엇보다 우리가 바다의 경이로 손색없는 고래를 직접 목격할 때 느끼게 되는 경외감이 영화 속 인물들의 극적 순간과 조응하며 장대한 찰나를 선물처럼 안겨준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작은 영화'지만 자연의 선물을 적절히 활용한 감흥은 결코 소박함으로 그치지 않는 감흥을 남긴다.
덧 : 52헤르츠 고래는 2004년 이후 한동안 사라졌지만, 2010년대 이후 다시 간헐적으로 관측되고 있다. 학자들은 대왕고래와 참고래의 교잡종이 아닐까 추정하는 중이다. 만약 2000년 전후로 포착되던 소리와 현재 확인되는 소리가 연속성을 지닌다면, 이 교잡종이 여전히 생존해 있거나 혹은 동료를 만났을지 모를 일이다.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52헤르츠로 공명할 상대를 찾았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와 소통하길 갈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소망하며.
▲영화 <52헤르츠 고래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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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52헤르츠 고래들
52ヘルツのクジラたち, 52-Hertz Whale
2024 일본 드라마
2024.09.04. 개봉 136분 15세 관람가
감독 나루시마 이즈루
출연 스기사키 하나(키코 역), 시손 쥰(안고 역), 쿠와나 토리(어린 소년 역),
오노 카린(미하루 역), 미야자와 히오(니이나 역), 카네코 다이치(무라나카 역),
니시노 나나세(코토미 역)
원작 마치다 소노코 <52헤르츠 고래들>
수입/배급 해피송
▲영화 원작소설 <52헤르츠 고래들> 앞표지직선과 곡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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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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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영혼의 짝을 찾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