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도대체 뭘 준비했을까"
1회에서 언급한 빠니보틀의 말처럼, 넷플릭스 예능 <더 인플루언서>는 한곳에 모인 인플루언서 77명이 무슨 일을 벌일지 궁금증을 유도하며 막을 연다. 한 명씩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인플루언서들은 모두 각자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이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거나,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온 이들도 눈에 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모습 자체가 진풍경이다.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궁금증은 커진다. 출연자들에게도 내용을 비밀로 한 제작진이 인플루언서를 주인공으로 한 첫 서바이벌 쇼에서 내놓을 무기는 무엇일까. 77명이 모두 등장했다.
미션을 요약하면 인플루언서 자격 검증이다. <더 인플루언서>는 1회 오프닝에서 "존재감, 파급력, 화제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미션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고 자신의 영향력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탈락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2시간 동안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청자를 모을 수 있는지, 7초 동안 자신이 촬영한 사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뺏을 수 있는지 등의 미션이 대표적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최고의 인플루언서를 뽑는 게임이면 누구보다 인플루언서다운 것이 자연스럽다. 출연자들도 순순히 미션을 받아들인다. 누군가 무대를 보며 말했다. "그래, 저게 인플루언서지."
수상하지만 뻔한 미션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제작진이 만든 미션을 통과한 출연자를 정말 더 좋은, 더 훌륭한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 미션은 제작진이 해석한 인플루언서의 자격 조건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서로에게 '좋아요'와 '싫어요'를 15개씩 줘야 하는 미션에서 대부분 출연자는 '좋아요'를 많이 받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싫어요'도 '좋아요'와 똑같이 점수를 주는 함정을 뒤늦게 공개했다. 출연자들의 탄식이 나왔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관심을 많이 받는 것이 인플루언서에게 필요한 자격이란 제작진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프로그램의 재미와 긴장감을 위해 반전을 숨겨둔 흔한 방식이다. 제작진은 자격 조건을 알아챈 일부 출연자들을 중심으로 편집해 시청자들에게도 그것이 옳은 생존 방법이었다는 것처럼 설명한다.
이처럼 미션들은 제작진이 정의한 인플루언서 자격 조건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으로 소비된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일부 출연진은 미션이 나올 때마다 제작진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려 애쓴다. 영향력이나 관심을 모으는 인플루언서로서의 능력보다 잔머리나 친화력, 문제 해석 같은 출연자 개인의 능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자신이 해온 것들을 증명하는 것으로 미션을 돌파하는 출연자는 극소수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제작진이 미치는 영향력은 커진다. 출연자의 탈락과 합격 여부는 운처럼 느껴진다. 인플루언서들이 어떤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는지, 이들의 진짜 매력을 무엇인지 드러내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의 본 의도는 점점 잊힌다.
가만히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도 등장한다. 온라인 라이브 방송으로 실시간 시청자 수를 대결하는 미션과, 현장 라이브 무대에서 더 많은 관객을 모으는 마지막 미션을 보면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떠올리지 않긴 힘들다. 과거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만든 제작진들이 자신들의 노하우를 재활용한 확장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시간 방송으로 인플루언서가 된 출연자도 있고, 영향력이 여전히 큰 것도 사실이다. 채널을 옮겨가는 시청자의 실시간 반응을 실제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과거에 머물고 있는 제작진
정작 <더 인플루언서>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첫 방송된 2015년과 2024년의 시간차를 반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실시간 방송의 매력을 주말 예능으로 가져온 파격이 있었다. 텔레비전 시대의 종결을 예감한 TV 제작진의 막막한 심정이 담은 마지막 블랙코미디처럼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대부분 시청자는 TV 앞을 떠나 OTT와 유튜브, SNS로 이동했다. 모두가 같은 방송을 봤던 과거 시청자들은 이제 좋아하는 플랫폼에서 좋아하는 인플루언서들의 모습을 본다. 대중 매체가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인플루언서들을 상대로 라이브 시청률 경쟁이나 화보 촬영 등 획일화된 미션을 주는 건 인플루언서의 인기 원인과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모습처럼 보인다.
출연자들은 탈락할 때마다 하나 같이 제작진 앞에서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증언한다.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는 말들이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허무한 이유로 탈락했다. 한번 잘못된 판단을 해서, 아니면 충분히 유명하지 않아서, 아니면 운이 나빠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인플루언서로서 어떤 점이 부족한 것인지 깨달을 만한 서사는 없었다.
다음 단계로 진출한 인플루언서 역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가 도움이 됐다고 말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소화되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삼킨 채 다음 장면을 보게 된다. 지금의 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인플루언서를 함께 살아가는 지인처럼 여긴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어쩌면 제작진은 눈앞에 보이는 인플루언서의 모습을 전부로 여기는 과거의 방식으로 접근한 것 아닐까. 방송 이후의 시간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인플루언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옳은가 싶다. 가장 트렌디한 인물들을 섭외해 가장 올드한 방식으로 쇼를 만든 제작진에게 이들을 자격을 검증할 자격은 있는가 싶다. 인플루언서들은 <더 인플루언서>를 통해 배운 게 있다고 말하지만, '더 인플루언서'는 이들에게 무엇을 배운 걸까. 인플루언서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입증하라고 밀어 넣은 이 프로가 정작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한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인플루언서>가 받은 '싫어요'는 프로그램 내용이 아닌 우승자 스포일러와 과즙세연 논란 정도였다. 진작 탈락했어도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