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우씨(王后 于氏)는 고구려의 제9대 고국천왕과 제10대 산상왕의 왕후였다. 한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2대에 걸쳐 왕후의 자리를 유지하며 형제를 남편으로 섬긴 인물로도 유명하다. 우씨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고대에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간 여장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위해 두 남자와 결혼하고 국정을 농단한 사악한 악녀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지난 28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23회에서는 '고구려 우씨 왕후는 왜 남편의 동생을 유혹했나'편을 통해 우씨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처벌 면한 우씨

 방송 장면 갈무리
방송 장면 갈무리tvN 스토리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씨의 아버지 우소는 고구려 5부 연맹의 하나인 연나부(椽那部)의 군장이었다. 역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우씨는 어린 시절부터 당차고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나부의 선조인 명림답부는 폭정을 일삼던 고구려 7대 차대왕을 폐위시키고 신대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우면서 연나부의 위상이 높아진다. 신대왕은 그 보답으로 연나부 출신의 우씨를 자기 아들 고국천왕과 혼인시켜 연나부를 외척으로 삼았다. 우씨는 고국천왕이 왕위에 오른 뒤 서기 180년 왕후에 책봉된다.

우씨가 왕후가 책봉되고 4년 만인 서기 184년 중국 후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가 침공하자 고국천왕은 연나부의 도움을 받아 이를 격퇴한다. 이로써 연나부와 우씨 왕후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다.

그런데 불과 6년 뒤 고국천왕과 우씨의 사이는 급격히 멀어지게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후의 친척들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므로 남의 자녀를 노략질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통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비류와 좌가려 등, 우씨의 연나부 친척들이 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고국천왕은 이를 듣고 분노해 연나부 귀족 세력을 숙청하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연나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고국천왕이 직접 출정해 이를 단숨에 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하지만 친척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우씨는 처벌을 면했다. 연나부의 상징과 같은 우씨를 축출한다는 건 고국천왕에게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결정이었다. 학계에서는 아직 왕권이 그리 강하지 못했던 부족 연맹체에 가까웠던 고구려 초기의 사정상, 국왕이라도 5부 연맹의 한 축인 연나부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신 고국천왕은 기세등등한 연나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 세력과 무관한 농부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재상으로 기용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을 보좌하여 왕권강화와 제도 정비에 앞장섰고, 서기 194년 백성에 대한 구휼책인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여 민생 안정에 큰 공을 세웠다.

우씨의 수상한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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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 5월, 고국천왕이 개혁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다. 그런데 왕후인 우씨는 남편이 죽은 날, 은밀하게 궁을 빠져나오는 수상한 행적을 벌인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남편의 형제인 고발기의 집이었다.

고국천왕과 우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왕이 사망할 경우 동생이 왕위를 이어야만 했다. 고국천왕에게는 고발기, 고연우, 고계수라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우씨는 세 형제 중 가장 장자로 왕위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고발기를 찾아가, 고국천왕의 죽음을 숨기고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돕는 조건으로 손을 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발기는 우씨의 속내를 간파하고 모욕을 주어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럼에도 우씨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셋째 왕자인 고연우의 집을 찾아간다.

우씨가 왕의 동생들을 연이어 찾아간 진짜 이유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당대의 혼인 풍습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고대에는 북방 민족을 중심으로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이라고 하여 형이 사망할 경우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형수와 부부생활을 이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현대적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쟁이 잦고 남성들의 수명이 짧았던 고대 사회의 특성상, 남편을 잃게 되면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던 형제의 아내와 자식을 지킴으로서 부족 구성원의 생존과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방식이었다.

여기서 우씨의 놀라운 점은, 본래 남성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철저히 남자 집안만을 위한 혼인 풍습에 불과하던 형사취수제를, 오히려 여성이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역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다. 도덕성과는 별개로 우씨가 엄청나게 치밀하고 냉정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고연우에 감복한 우씨

두 번째로 찾아간 고연우는 형 고발기와 달리, 형수인 우씨를 예를 갖춰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고연우에게는 우씨의 방문이 왕권을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우씨 역시 고연우의 태도에 감복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씨는 고연우에게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마땅히 장자인 발기가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여 난폭하고 거만하고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고연우는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고기를 썰어주며 우씨와 손을 잡겠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고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손을 다치자 우씨가 직접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매줬다고 한다.

고대 삼국시대의 여성 의복은 치마끈이 옷안에 감춰진 구조였다. 여성이 남성 앞에서 치마끈을 풀었다는 것은 부부 사이 같은 밀접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해군대(解裙帶, 치마끈을 풀다)는 표현은, 남녀 간의 은밀한 상황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도 쓰인다. 우씨와 고연우가 정치적인 밀약과 동시에 남녀관계를 맺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해석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씨는 고연우와 함께 궁으로 돌아온다. 우씨가 고연우를 궁으로 들인 것은 왕의 고명(顧命, 유언)을 직접 들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후 우씨는 신하들을 불러 고국천왕의 승하를 알리고 고연우가 후계자가 되었음을 공식 선포한다. <삼국사기>에는 "왕후가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고연우는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0대 국왕에 즉위하니, 바로 산상왕이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고발기는 크게 분노하여 산상왕을 협박했으나 정작 고구려 내에서 고발기를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고발기가 성품에 큰 결함이 있어서 귀족세력 사이에서 인망을 얻지 못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일무이한 왕후, 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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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는 요동으로 달아나 후한에 항복했고 적국의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산상왕은 용장이던 동생 고계수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게 했다. 고발기의 군대는 크게 패배했고 고발기는 고계수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 고계수는 사사로운 원한으로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형 고발기를 크게 꾸짖었다. 부끄러움과 후회를 견디지 못한 고발기는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을 맞이했다. 산상왕은 형 고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줬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한 산상왕은 형수였던 우씨를 다시 왕후로 맞아들인다고 선포했다. 정작 산상왕은 이미 결혼해 처자식도 있는 상태였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우씨로 인해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부터 마지막 왕조 국가였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번에 걸쳐 왕후에 책봉된 것은 우씨가 유일무이하다.

이처럼 두 명의 왕을 번갈아 남편으로 두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우씨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힘을 빌려 집권한 산상왕은 우씨와 연나부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후사가 없음에도 마음대로 후비를 들이지도 못했다. 귀족 연맹체 사회였던 고구려에서 왕권이 그만큼 취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 208년 11월, 산상왕은 우연히 주통촌이라는 마을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신성한 제사에 사용할 돼지가 달아나자 여인은 몸을 사리지 않고 돼지의 앞으로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산상왕은 우씨의 눈을 피해 몰래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여인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후녀(后女, 왕후가 될 여인)였다고 한다. 산상왕은 5년 전 돼지꿈을 꿨던 것이 바로 후녀를 맞이들이기 위한 계시였다고 여기고, 그녀와 동침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후비를 들이고 싶었으나 우씨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산상왕이 적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꾸며낸 핑계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몇 달 뒤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 우씨는 병사들을 보내 후녀를 죽이려고 했다. 당시 후녀는 이미 산상왕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도망가던 후녀는 막다른 곳에 몰리자 후녀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배속에 아이가 있는데 실로 왕이 남겨준 몸이다. 내 몸은 죽일수 있겠으나 왕의 아이도 죽일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질렀다고 한다. 당황한 병사들은 후녀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를 알게 된 산상왕은 후녀를 데려와 후비로 삼았고, 우씨에게는 두 번 다시 후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우씨로서도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209년 9월, 산상왕 재위 13년 만에 후녀가 마침내 아들을 낳으니 바로 고구려의 11대 국왕이 되는 동천왕이다.

우씨의 막강한 위세

후비가 아들을 낳았으나 우씨 왕후의 권력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우씨로 대표되는 연나부 세력과 산상왕 사이에서,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 주는 댓가로 후비와 아들을 건드리지 않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27년 5월 산상왕이 승하하고 동천왕이 그 뒤를 이었다. 왕태후가 된 우씨와 연나부는 동천왕 즉위 이후에도 막강한 위세를 뽐냈다. 기록에 따르면 우씨는 놀랍게도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거나, 시종을 시켜서 식사하는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했다고 한다. 왕을 대놓고 무시하고 핍박할 정도로 우씨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랜 세월 천하를 호령하던 우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세월이었다. 왕후로 47년, 왕태후로 7년, 반세기 넘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우씨도 노년에 접어들며 건강이 점점 악화됐다. 삶이 다했음을 직감한 우씨는 '산상왕의 능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형사취수혼을 한 아내는 본 남편(고국천왕)의 곁에 묻히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우씨가 정략혼을 했던 첫 번째 남편 고국천왕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혼인했던 산상왕을 더 진정한 남편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34년 9월, 우씨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시신은 유언대로 산상왕의 곁에 묻히게 된다.

우씨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후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유교적 가치관과 가부장제가 확립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씨는 '희대의 악녀'로 온갖 악평을 받게 된다.

<동사강목>에는 "한 몸으로 두 번이나 국모가 되었으니 완악하고 음탕하고 부끄러움이 없기가 고금천하에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선비들을 두고 "그 행위가 개돼지만도 못하다, 짐승 같은 행실 추악하다"고 앞다투어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는 우씨의 이야기 거론되자 "이는 말할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음란하고 더러운 말을 입에 가까이해서는 안 되니 진강하지 말라"고 역정을 낼 만큼 혐오했다고 한다.

우씨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정해진 운명을 거부했고, 당대의 제도를 이용해 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왕위 계승을 조작해 신성한 왕권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은 악녀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남편과 가족에 대한 도덕도,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도 모두 지키지 않았던 우씨가, 결국 금기를 어긴 사악한 여성이라는 오명으로만 오랫동안 남게 된 이유다.
벌거벗은한국사 우씨왕후 산상왕 고국천왕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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