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197년 5월, 고국천왕이 개혁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다. 그런데 왕후인 우씨는 남편이 죽은 날, 은밀하게 궁을 빠져나오는 수상한 행적을 벌인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남편의 형제인 고발기의 집이었다.
고국천왕과 우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왕이 사망할 경우 동생이 왕위를 이어야만 했다. 고국천왕에게는 고발기, 고연우, 고계수라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우씨는 세 형제 중 가장 장자로 왕위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고발기를 찾아가, 고국천왕의 죽음을 숨기고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돕는 조건으로 손을 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발기는 우씨의 속내를 간파하고 모욕을 주어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럼에도 우씨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셋째 왕자인 고연우의 집을 찾아간다.
우씨가 왕의 동생들을 연이어 찾아간 진짜 이유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당대의 혼인 풍습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고대에는 북방 민족을 중심으로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이라고 하여 형이 사망할 경우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형수와 부부생활을 이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현대적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쟁이 잦고 남성들의 수명이 짧았던 고대 사회의 특성상, 남편을 잃게 되면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던 형제의 아내와 자식을 지킴으로서 부족 구성원의 생존과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방식이었다.
여기서 우씨의 놀라운 점은, 본래 남성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철저히 남자 집안만을 위한 혼인 풍습에 불과하던 형사취수제를, 오히려 여성이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역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다. 도덕성과는 별개로 우씨가 엄청나게 치밀하고 냉정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고연우에 감복한 우씨
두 번째로 찾아간 고연우는 형 고발기와 달리, 형수인 우씨를 예를 갖춰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고연우에게는 우씨의 방문이 왕권을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우씨 역시 고연우의 태도에 감복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씨는 고연우에게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마땅히 장자인 발기가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여 난폭하고 거만하고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고연우는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고기를 썰어주며 우씨와 손을 잡겠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고연우가 고기를 썰다가 손을 다치자 우씨가 직접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매줬다고 한다.
고대 삼국시대의 여성 의복은 치마끈이 옷안에 감춰진 구조였다. 여성이 남성 앞에서 치마끈을 풀었다는 것은 부부 사이 같은 밀접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해군대(解裙帶, 치마끈을 풀다)는 표현은, 남녀 간의 은밀한 상황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으로도 쓰인다. 우씨와 고연우가 정치적인 밀약과 동시에 남녀관계를 맺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해석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씨는 고연우와 함께 궁으로 돌아온다. 우씨가 고연우를 궁으로 들인 것은 왕의 고명(顧命, 유언)을 직접 들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후 우씨는 신하들을 불러 고국천왕의 승하를 알리고 고연우가 후계자가 되었음을 공식 선포한다. <삼국사기>에는 "왕후가 선왕의 왕명이라 속이고 여러 신하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고연우는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0대 국왕에 즉위하니, 바로 산상왕이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고발기는 크게 분노하여 산상왕을 협박했으나 정작 고구려 내에서 고발기를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고발기가 성품에 큰 결함이 있어서 귀족세력 사이에서 인망을 얻지 못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일무이한 왕후, 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