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던 2016년 7월 13일. 안보를 위해서란 명분으로 경북 성주군 중심부인 성산포대에 속칭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라 불리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요격체계 설치가 발표된다. 미국의 록히드 마틴이 개발한 '사드'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같은 다용도 방어체계와 달리 오직 탄도탄 요격에 특화돼 기존의 유사한 시스템들과는 한 차원 다른 성능과 규모를 가졌다.

정부의 발표는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한 조기경계와 요격을 위함이었지만, 많은 이들은 미국의 대중국 봉쇄망 일환이라 해석했다. 그래서 신냉전에 한국이 휘말릴 것을 극도로 우려하게 된다.

졸지에 동북아 미중 대결 구도의 핵심이 된 성주군 주민들은 격렬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미디어에 수시로 등장한 거대한 인간 띠 잇기는 군민들의 일치된 반대 의지를 상징하는 풍경이었다. 이 극적인 대치는 박문칠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파란나비효과, 2017>에 그 숨 가쁜 상황이 속보 형태로 압축된 형태로 첫 번째 영화화됐다. 본 작품은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 수상 후 극장에서 개봉했다.

군민 중 4할이 당시 집권 여당 당원이던 성주군에서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히자 당황한 정부는 최적 부지 입장을 두 달 만에 번복한다. 새로운 기지 터로 2016년 9월 30일 공표된 장소는 성주와 김천 경계에 자리한 산간마을 소성리였다.

이 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롯데 소유의 골프장이 있었다. 정부는 기업에는 대체부지를 마련해 주기로 한다. 성주 시내에 비하면 몇 안 되는 고령의 주민들만 사는 작은 동네라 보상대책 좀 시행하면 쉽게 해결되리라 판단한 결과다. 인접한 김천 시민들이 새로운 반대세력으로 가세해도 성주군 전체에 비하면 수월하다는 고려도 한몫했다. 이제 만사형통만 남았다.

하지만 성주군 다른 지역이 속속 이탈하는 과정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외롭게 남겨진 소성리에는 '외부세력'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마을의 '할매'와 '할배'들은 사탕발림에 넘어오지 않고 고향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철벽처럼 항거했다. 여전히 충돌이 벌어지고, 피해는 늘어만 갔다. 연대 단위 중에는 반전 평화운동 단체는 물론 소성리 인근에 성지가 있던 원불교 신도들도 보였다. 그렇게 소성리는 새로운 전장이 됐다. 그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2년 19일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이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 전원일치로 파면됐다.

이제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 해결은 시간 문제로만 보였다. 그런 소성리에서의 싸움은 박배일 감독에 의해 두 번째로 영화화됐다. 제목부터 <소성리, 2017>인 작품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시상인 '비프메세나 상'을 수상하며 다음 해 개봉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더디 가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리라 다들 기대하던 시간이었다. 2편의 영화는 언제고 과거 회상과 추억의 대상으로 흘러갈 예정임을 의심치 않았다

투쟁 다큐멘터리와 '전원일기' 사이에서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당연히 세 번째 영화는 나올 이유도, 나와서도 안 될 존재였다. 다큐멘터리로 굳이 기록될 상황이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반증이기 때문이다. 꼭 영화가 또 만들어져야 한다면 그저 소품 형태로 후일담을 다루는 정도면 무난할 테다. 하지만 결국 제3의 영화가 탄생하고 만다. 대체 소성리엔 무슨 일이 이어진 걸까?

2017년 4월 26일, 박근혜 대통령 파면 이후 권한대행을 맡던 황교안 총리는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 취임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드 관련 장비 기습 반입을 결정한다. 권력 공백 상황에서 신임 대통령이 실타래를 풀고 재검토하길 기다리는 게 당연한 시기에 굳이 강행한 것이다. 이제 안심하고 있던 주민들에겐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다. 이후 추가 장비 반입을 저지하고자 끝없는 대치가 계속된다.

성주 사람들도 소성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고즈넉하게 산속에 파묻힌 조용한 마을은 그렇게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성주군 중심지역은 이 작은 마을을 마치 제물로 치부하듯 외면했고, 고령의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버티겠냐는 게 사정 모르는 이들 대다수의 무정한 인심인 셈이다. 그런 선입견이 있거나 말거나 주민들은 정든 고향에서 때가 되면 농사를 짓듯 투쟁을 이어나갔다. 김상패 감독은 소성리 빈집에 자리를 잡고 3년간 이어질 촬영을 개시한다.

이같은 전후 사정 탓에 <양지뜸>의 전반부는 강제개발에 맞선 투쟁현장과는 얼핏 동떨어진 풍경으로 시종일관 이어진다. 감독은 마치 일본 다큐멘터리의 전설, 오가와 신스케 감독과 스태프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귀농한 도시인이 돼 마을 노인들과 교류하며 지낸다. 집회에 참석해 일원으로 발언하자 오히려 사회자가 우리에겐 영화가 필요하다! 본분을 일깨우는 장면이 깨알같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게 사드 투쟁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더니 전원일기 보는 기분이 한동안 계속 들 정도다.

예전의 기록영화들에서도 주인공처럼 등장해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익숙한 얼굴들이 이 영화에서도 역시 화면에 빠지면 서러워할 것처럼 출연한다. '봉정댁'과 '봉정양반', 부녀회장님, 원불교 교무님 등 낯익은 얼굴들이 잔뜩이다. 은근히 반가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감독은 집마다 방문해 밥도 얻어먹고 술도 마시며 노인들 말동무가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창 정신없던 투쟁현장을 기록할 때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와 속사정이 요술 주머니 풀리듯 나온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그 개별의 삶들이 한국 현대사의 구술기록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이 자연히 연결된다. 왜 그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요즘 유행어대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듯 견디는지 이해하는데 필수요소다.

체험 삶의 현장은 계속된다. 감독을 포함한 동네 주민과 연대 활동가들은 함께 일상의 공동체를 이어나간다. 마을회관에서 공동밥상을 차리고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를 꾸려간다. 함께 노래도 배우고 춤도 추고 농사일도 더불어 진행한다. 감독은 '00 프로젝트'란 명목으로 텃밭에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물을 가공하는 시도를 거듭한다. 참외의 명산지답게 풍성하게 나온 참외로 장아찌를 담그기도 하고, 마늘과 배추도 이것저것 궁리한다(하지만 후일담에 의하면 제대로 소출을 거두진 못했다는 듯).

그렇게 고즈넉한 일상이 3년 동안 이어진다. 그냥 장르를 바꾸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움이 가득 감돈다. 격렬한 투쟁이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소성리의 투쟁은 계속된다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하지만 사드가 마을 주민들에게 아무 허락도 구하지 않고 강행된 것처럼, 한동안 소강상태로 대치하던 국면이 바뀌기 시작한다. 감독이 이러다 다큐멘터리 원래 기획대로 못 만들 것 같다는 고민 끝에 3년간의 소성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나자마자 2021년 5월부터 마을회관 앞 도로 구간, '양지뜸'을 주 2회 군경이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수백, 수천의 인원이 길목을 가로막고 주민들을 밀어내며 점령군처럼 들이닥친다. 2022년 2월부터는 통제횟수가 주 3회로 증강된다. 육상도로 확보는 사드가 배치된 기지 일대 수송로와 장비 반입 통로를 영구화하기 위함이다. 충돌을 회피할 겸 헬기로 수송하려니 워낙 번거롭던 참이다. 즉 영구주둔기지로의 길이다.

다시 주민과 연대 단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원일기 보는 것 같던 풍경이 익숙한 투쟁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대책회의와 집회 장면으로 마치 주제가 바뀐 양, 사실은 원래 기획 의도대로 돌아온 셈이다. 다시금 조용하던 마을에 전운이 감돌고, 수차례 물리적 충돌이 화면을 채운다. 보고 싶지 않았던,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들어찬다.

항의하다 질질 끌려나가는 노인들, 절규하며 항변하는 주민들, 이를 외면한 채 침묵과 무시로 일관하는 경력, 신기해서 구경하는지 조롱하는지 알 수 없는 미군의 풍경이 교차한다. 바깥세상에선 이미 다 끝난 일이라 치부하며 망각하고 있지만, 소성리의 싸움은 현재진행 중이다. 그리고 미래로 이어질 테다.

예전에 등장한 사드 배경 영화들이 특정한 투쟁의 단락을 정리하는 시의성과 중간정리에 충실한 압축을 선보였다면, <양지뜸>은 '일상물'의 호흡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시기 구분처럼 화면 중간에 표기되는 '1', '2', '3'은 중간에 깜빡하면 흐름을 놓치기 쉬운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시기 기록을 감독이 소성리에 체류하던 연간 단위로 구분하는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명백한 국면 전환으로 판단된 특정 시기는 해설처럼 검은 화면 배경에 자막으로 언급되지만, 엄격한 카테고리 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조금씩 고령으로 유명을 달리해 가면서도 숨을 쉬는 한 절대 굴복하지 않을 주민들의 굳센 의지, 그리고 의지의 바탕이 된 장구한 인생사가 쐐기처럼 뇌리에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지뜸>은 급박한 투쟁 국면에서 '미디어'를 무기로 활용하는 데 즉시 전력감으로 투입하기엔 다소 거리감이 있다. 그 대신 어느 정도 소성리의 사정을 인지하고 있긴 한데, 요즘 한동안 관심을 돌리지 못하던 이들에겐 제비가 소식을 전하듯 반가운 영상편지로 활용되기에 썩 무난한 내용물이다.

지금도 양지뜸 볕 좋은 길가에서 일상의 싸움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안부를 확인하거나, 고인이 된 어르신들을 마음속으로 추모하고픈 이들에게도 괜찮은 선택지가 될 테다.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면 오랜만에 '양지뜸'을 찾을 마음이 생긴다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목표는 관객 동원과는 무관하게 성공을 거뒀다고 봐도 좋겠다.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영화 <양지뜸> 스틸 이미지 ⓒ 블루필름웍스


"양지뜸" 포스터 영화 <양지뜸> 포스터

▲ "양지뜸" 포스터 영화 <양지뜸> 포스터 ⓒ 블루필름웍스


[작품정보]

양지뜸 Our Sunny Paradise
2023 | 한국 | 다큐멘터리
2024.08.21. 개봉 | 85분 | 12세 관람가
연출/기획 김상패
조연출 나단아
출연 봉정댁(도금연), 대구댁(임순분), 진기댁(여상돌), 수천댁(도경임),
성주댁(임길남), 봉정양반(故 이채구)
촬영/편집 김상패, 나단아
제작 스물둘
배급 블루필름웍스

2023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신인감독상(특별상)
양지뜸 소성리 사드 김상패감독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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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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