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1931-2021)은 대한민국의 11-12대 대통령이자, 군사반란을 일으켜 반대파와 자국민들을 학살해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다. 전두환 정권은 7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갈망한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퇴임 후, 전두환은 짧은 권세를 뒤로하고 청문회와 유배, 법정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한때는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독재자도 언젠가 심판당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건 그만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증명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두환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과거청산 등은 말끔하게 해소되지 못한 채 다소 찝찝하게 종결되었다는 한계도 남겼다.

지난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전두환 심판의 날'편을 통해 전두환의 말년과 역사 바로 세우기의 여정을 조명했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방송장면 갈무리

방송장면 갈무리 ⓒ SBS


사실 전두환은 이미 퇴임 직후부터 여러 번 심판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쿠데타 동지이자 절친이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집권에 성공하며 군사정권이 이어졌지만, 동시에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 된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한 야권은 전두환 정권의 비리와 5·18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어쨌든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시대처럼 무조건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야당과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2월,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5공화국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전두환을 향한 첫 번째 심판의 칼날이었다. 당시 청문회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TV를 통하게 생중계되며 무려 81%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장세동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5공정권의 실세, 유명 정치, 관료, 기업인 등이 줄줄이 청문회에 소환됐다. 그리고 12월 31일에는 전 대통령이 된 전두환도 결국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전두환은 질의응답 없이 미리 준비한 발표문만 낭독하고 자리를 피했다. 전두환은 5·18에 대해서는 사과 없이 '정당한 자위권 행사였다'고만 주장하며 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자아냈다.

청문회 결과, 전두환의 측근과 일가친척들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전두환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미 그해 11월 23일 이미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고 비자금 환원을 사회에 약속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전두환은 노태우 정권과의 암묵적인 합의로 사찰인 백담사로 피신해 한동안 유배상활을 하는 것으로 처벌을 모면했다. 그렇게 전두환을 향한 첫 번째 심판 시도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비록 3당합당으로 군사정권과 타협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32년 만에 군사정권을 종식시킨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다. 특히 김 대통령은 야당 시절 군부독재에 유난히 강하게 저항한 인물로, 전두환과는 서로 치를 떨 만큼 싫어하던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에는 군내 사조직'하나회 숙청',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정리' 등을 추진하며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개혁 조치를 단행하여 국민들의 높은 지지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작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에는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 과정에서 5공 관련자에 대한 처벌 감형을 두고 정치적 거래를 해야 했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여기에 정권 차원에서 심판을 주도한다면 자칫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는 절차적 부담도 안아야 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만 해도 속내와 별개로 전두환-노태우를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고, 청와대에 초청하며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당시에 나온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논리는 유행어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4년경에 접어들며 상황이 반전된다. 12·12 쿠데타의 피해자였던 장태완과 정승화 전 장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족들이 연이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하며 법의 심판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검찰은 이를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하며 기소 자체를 거부했다. 초기에 단죄에 미온적이던 김영삼 대통령도 이 소식을 듣고는 검찰에 크게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김영삼 정부가 갑자기 태세를 180도 전환하며 전 정권 심판에 앞장서게 된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속사정이 있었다. 초기에 높은 지지율을 달리던 문민정부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초대형 사건·사고가 이어지며 지지율이 급락했고 민심이 크게 이반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면 전환과 지지율 회복을 위하여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선언하며 과거사 청산을 위한 칼을 뽑아 들게 된다.

문제는 검찰이 이미 군사정권 세력에 불기소 처분을 내린 상황이었다는 것. 대통령이자 여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를 이용하여 1995년'5·18 특별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군사정권을 단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특별법이 통과되고 두 달 만에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최환 검사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기존의 검찰 기조를 거부하며 전 정권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주도했다. 그는 영화 < 1987 >에서 배우 하정우가 연기한 검사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최환 검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사건을 덮으라는 외압을 받았음에도, 서슬퍼런 권력의 지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을 만큼 강단 있는 검사였다.

노태우의 비자금

 방송 장면 갈무리

방송 장면 갈무리 ⓒ SBS


이미 전두환에 앞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던 노태우가 먼저 비리 혐의로 탄로나 감구치소에 수감된다. 1995년 10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가 뇌물수수와 대규모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노태우가 조성한 비자금은 약 4천억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로 밝혀졌고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도 노태우로부터 비자김을 받았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10월 27일 노태우는 기자회견을 열고 비자금의 존재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11월 16일, 노태우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며 헌정 사상로 최초로 수감된 전직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면서 군사정권에 대한 단죄 여론은 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1995년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태와 5·18에 대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재수사에 돌입하며 본격적으로 전두환과 5공 세력을 겨냥한다.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 몰린 전두환은 강하게 반발했다. 12월 2일,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 앞에서 측근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김영삼 정권의 정치보복을 비난하며 검찰의 수사에 일절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골목성명'을 발표한다.

당일은 검찰이 전두환에 출두명령을 내린 날이었으나, 전두환은 이를 거부하고 성명 발표 직후 곧장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검찰은 이를 도주로 간주하고 전두환을 긴급체포하기로 한다.

12월 3일 새벽 6시, 수사팀은 합천으로 내려가 일부 마을주민과 지지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5촌 조카의 집에 머물고 있던 전두환을 전격 체포한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이 체포되어 끌려 나오고 안양교도소로 이송되는 모습은 TV를 통하여 일거수일투족이 전 국민들에게 생중계되며 큰 충격을 안겼다.

이로써 전두환과 노태우는 나란히 수의를 입고 법정에 서게 됐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동시에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세계 역사에도 유래를 찾기 힘든 초유의 사건이었다. 외신들도 이 세기의 재판에 주목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측은 재판 기간 내내 불성실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전두환의 변호인은 '12·12는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5·18은 내란목적 살해 행위가 아닌 시위 진압이 목적이었다'는 논리를 고수했다. 또한 전두환은 자위권을 지시했을 뿐 시민들에 대한 발포명령은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법원은 1심에서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7년 6개월 기간은 공소시효가 일시 정지된 것이기에, 12·12에 대한 공소시효는 아직 유효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또한 5·18에 대해서는 자위권 발동지시가 실질적인 발포명령이었다고 판단하며 피고인들의 주장을 기각했다. 사형이 선고되던 순간에는 충격이 컸는지, 재판 내내 그토록 뻔뻔하던 전두환의 표정도 순간적으로 크게 일그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전두환의 사형 집행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2심과 3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

전두환 심판은 '미완성'

 방송 장면 갈무리

방송 장면 갈무리 ⓒ SBS


전두환과 노태우의 옥중 시절, 두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으며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과 유언비어가 제기되기도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다른 수용자들과 격리된 독립 사동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일반 수용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고 교도소 환경에도 나름 잘 적응했다고 한다.

1997년 12월 22일, 놀랍게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아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감옥을 나온다. 당시는 대선정국이었고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출마한 유력 차기 대권 후보들조차 모두 전두환-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상황이었다.

풀려난 두 사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옥 밖으로 나섰다. 전두환은 불과 750일, 노태우는 767일 만의 출소였다. 진심 어린 반성이나 사과의 메시지는 없었다. 그렇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기대는 또 한 번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출소 후 비교적 조용히 지냈던 노태우와 달리, 전두환은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각종 구설에 휘말렸다. 전두환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며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2017년에는 2000페이지에 이르는 회고록을 발간하여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고, 5·18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고 조비오 신부를 비방하다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했다.

대표적인 악연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런 전두환의 행보를 누구보다 고깝게 여겼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청와대에 함께 초청받았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두환을 향해 "너는 여기 술처무러 왔나", "죽어도 국립 묘지에도 못 간다"며 면전에서 대놓고 독설을 퍼부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전두환은 그렇게 사실상 전직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말년까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이후 다시 의식을 찾지 못했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항소심 결심공판을 불과 6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렇게 결국 전두환을 향한 마지막 심판은 '미완성'으로 남은 채, 한 시대의 독재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5·18 피해자 중 한 명이던 고 이광영씨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공교롭게도 가해자인 전두환과 같은 날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을 또 한 번 숙연하게 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티아나의 격언이다. 한때 국민 위에 군림하던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심판하는 데 있어서 국민의 여론이 큰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 이들이 사면되고 복권되어 천수를 다 누리게 된 것도 결국 당시의 여론 덕분이었다는 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어쩌면 법적 처벌보다도 더 중요하고 오래 남는 것은, 지나간 역사의 아픔과 교훈을 잊지 않고 가슴속에서 새겨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꼬꼬무 전두환 김영상정부 5공청산 역사바로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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