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에서 귀신(鬼神, Ghost)은 잡스럽고 괴이한 존재와 성스럽고 숭배할만한 대상을 모두 아우르는 합성어로 모든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귀신은 다시 원귀(寃鬼)와 악귀(惡鬼)로 나뉘는데, 전자는 생전에 이루지못한 한으로 귀신이 된 존재라면, 후자에게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해를 끼치는 악한 영향의 귀신을 의미한다.

먼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귀신 이야기들은, 단순히 자극적이고 무서운 괴담을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정서, 철학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공식 역사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수많은 야사들 속에서도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들은 넘쳐난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등 조선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들도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tvN STORY
 
괴담으로 돌아본 조선시대 사회상

옛날 사람들은 과연 귀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괴담과 충격적인 기록들 이면에 숨어있는 선조들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8월 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20회에서는 '공포의 조선 5대 귀신史'편을 통하여 다섯 가지 괴담으로 돌아본 당대의 사회상과 숨은 메세지를 조명했다.

첫번째 이야기인 '객사의 기생 귀신'은 조선 후기 문인 홍만종이 작성한 패설집 <명엽지해>에 등장하는 일화다. 조선 11대 중종 시절에 유능하고 강직한 관리였던 조광원이라는 인물이 외교 사신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명나라로 떠나게 됐다.

평안도의 한 마을에 도착한 조광원은 객사가 '불길한 흉가'라면서 사가로 모시겠다는 마을 관리들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예정대로 객사에 머문다. 늦은 밤, 잠을 청하던 조광원이 수상한 소리를 듣고 깨어나니,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는 피에 흥건히 젖어서 온몸이 토막난 사람의 시신이 나타난다.

잠시후 시신은 하나둘씩 형체를 갖추더니 한 여인의 모습으로 바뀐다. 객사를 흉가로 만든 여인의 정체는 바로 '처녀귀신'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조광원 앞에 무릎을 꿇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생전에 기생이었고 한 관노의 꾀임에 빠져 겁탈당한 위기에 처하자 강하게 저항하다가 그만 관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인의 시신은 관노가 던진 바위에 깔려 참혹하게 훼손되었고 아직까지도 방치된 상태였다.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조광원은 해당 관노를 처벌하고 여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장례까지 치러주며 비로소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용재총화>,<고금소총 > 등 고전 패설속에서 등장하는 처녀귀신의 모습은, 대부분 '죽을 때 당시의 참혹한 모습' 그대로 나타나 주인공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놓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연히 <명엽지해>의 객사 귀신 에피소드처럼, 그 형체가 훼손되거나 온전하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지금보다 더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모습이나 성격을 지닌 귀신들도 많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단정한 소복을 입고 진지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자 귀신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구축된 것은, 의외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7년 개봉한 한국 토속 공포물의 원조인 <월하의 공동묘지>는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서 한국 귀신하면 떠올리는 보편적 이미지를 정립한 최초의 작품으로 꼽힌다.

두 번째 이야기인 '태자귀(太子鬼)'는 <어우야담>과 <성호사설>에 기록된 일화로 '조선판 흑마법 사건'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개성에서 살던 선비였던 김위라는 인물의 아들이 갑자기 실종된다. 김위는 무려 6년만에 황해도 재령의 한 동굴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아이를 찾아낸다.

아이가 사라졌던 진짜 이유는 염매(厭魅)라는 사악한 주술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하여 한 무당에게 유괴된 것이었다. <성호사설>에는 염매의 수법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무당은 아이를 유괴해 비밀스런 곳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음식을 주어 연명시킨다. 아이는 점차 괴로움 속에 말라가며 점점 음식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게 된다. 결국 아이가 피골이 상접하여 죽기 직전에 이르게 되면, 대나무통 깊숙히 음식을 넣어 아이 앞에 놓는다.

아이가 음식에 대한 일념으로 좁은 대나무통에 억지로 들어가는 순간, 무당은 아이를 찔러죽이고 뚜껑을 닫아 봉한다. 염매에 의하여 대나무통안에 갇힌 아이의 한맺힌 원혼은 그대로 태자귀(한을 품은 어린 아이 귀신)가 된다.

그리고 무당은 부유한 집을 찾아가 통을 열어서 일부러 태자귀가 깃들게 한다. 사람들이 원인모를 병에 걸려 고통받으면, 무당이 다시 찾아와 귀신을 쫓아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염매는 고대부터 실제로 존재했던 술법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염매를 금지하였다'는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사악한 주술로 간주하여 두려워했다고 한다.

결국 돈벌이 수단으로 아이를 유괴하여 잔혹하게 살해하고, 죽어서까지도 그 원혼을 이용하려는 사악한 아동범죄수법이 만연하던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씁쓸한 일화다. 다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유학자와 지식인 계층의 시점에서 무속신앙을 폄훼하기 위하여 지어내거나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세 번째 이야기인 '동자삼 전설'은 가족애와 희생정신을 다룬 유명한 일화로 효자 혹은 부부편 등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부부 편에 따르면 남편이 원인모를 중병에 걸려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어가자, 근심하던 아내는 한 스님으로부터 '부패하지 않은 시신의 다리를 떼어 약을 달이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처방을 얻게 된다. 다만 스님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한 가지 금기를 지킬 것을 신신당부한다.

고민하던 아내는 결국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두려움을 무릅쓰고 묘지를 찾아가 한 시신의 다리를 떼어낸다. 하지만 돌아오던 아내는 등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자, 스님이 일러준 금기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곳에는 다리를 잃은 귀신이 "내 다리 내놔"를 외치며 외발로 껑충 뛰어가며 아내를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아내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질주하여 간신히 집으로 도망쳐왔다. 아내가 문을 걸어잠그고 벌벌 떨면서 끓는 가마솥에 다리를 집어넣자, 그제야 귀신은 홀연히 사라진다. 다음날 아내가 만들어준 약을 먹고 남편의 병은 씻은 듯이 치유된다.

이후 부부가 지난밤 시체의 다리를 삶았던 가마솥 뚜껑을 열자, 그안에는 놀랍게도 산삼인 동자삼이 들어있었다. 아내의 용기와 희생에 감동한 하늘이 시체의 다리를 동자삼으로 바꿔줬던 것이다.

결말은 해피엔딩이기는 하지만 '인육과 시체훼손'이 등장하는 대목은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불편함을 자아낼수 있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실제로 인육과 관련된 사건들이 다수 등장한다. 피부병(한센병으로 추정)을 쾌유하는데 인육과 사람의 장기가 도움이 된다는 속설이 퍼지기도 했고, 흉악범들이 인육을 얻기위하여 유괴와 살인, 장기매매를 저질렀다는 기록들도 남아있다.

오늘날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엄연히 범죄라고 할 수 있는 동자삼 일화의 결말이 오늘날에는 판타지적인 미담에 가깝게 바뀌게 된 것도, 시체 훼손과 인육을 먹는다는 거부감과 죄의식을 미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게 학계의 해석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욕심많은 구두쇠 남편이 목격한 부인의 충격적 실체'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등장하는 일화다. 한 마을에서 인색하기로 소문난 구두쇠 남편은 쌀이 빨리 줄어드는 게 아깝다는 이유로 먹성이 좋던 아내를 쫓아냈다. 이후 남편은 새로운 부인을 맞아들인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은 새 부인이 식사량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장독의 쌀이 이상하리만큼 빨리 줄어드는데 의구심을 품게 된다. 부인이 쌀을 빼돌리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은 남편은 몰래 부엌 근처에 숨어 부인의 행동을 염탐한다. 늦은 밤에 부인은 예상대로 엄청난 양의 쌀을 가마솥에 쏟아붓고 밥을 짓고 있었다.

아내가 쌀을 빼돌린 것을 확신하고 분노한 남편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갑자기 아내의 정수리가 열리더니 갓 지은 밥을 입이 아닌 머리로 쏟아붓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알고 보니 아내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라 정수리에 주둥이가 달린 귀신이었던 것.

경악한 남편은 그제서야 '내가 본처를 각박하게 쫓아낸 죄로 귀신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한다. 그 순간 남편은 뒤를 돌아본 아내와 눈이 마주쳤고, 그것을 끝으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이야기는 '조선을 벌벌 떨게 한 붉은 반점'의 정체로 <천예록>에 등장하는 일화다. 여기서도 네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역시 '음식과 귀신'과 관련된 내용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한 선비가 한양의 본가로 돌아가는 길에 한 객잔에 머물렀는데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그런데 노인은 "내가 이 집에서 머무른지 며칠이나 됐는데 집주인의 접대가 아주 형펀없다. 그래서 내가 벌로 그 집 아이를 죽이려고 한다"는 섬뜩한 이야기를 꺼냈다. 모골이 송연해지며 잠에서 깨어난 선비는 노인의 정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 '마마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마는 '천연두'를 의미하며 조선 시대에는 한 번 걸리면 목숨을 잃는 불치병으로 꼽혔다. 조선사람들은 천연두를 왕족을 호칭하는 마마로 높여서 불렀으며, 천연두를 치료하는 것은 마마신을 퇴치하는 행위로 여겨져서 신을 화나게 할까봐 치료조차 포기할만큼 두려워했다고 한다.

선비가 마마신을 만나는 꿈을 꾸고 난 후, 집주인의 아들은 실제로 천연두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인다. 이에 선비는 집주인에게 마마신이 원하는대로 꿩고기, 쇠고기, 곶감을 올린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차릴 것을 당부한다. 집주인은 선비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제사상에 만족한 마마신이 노여움을 풀고 떠나자 그제야 집주인의 아이는 거짓말처럼 병에서 회복했다고 한다.

이처럼 옛날의 귀신 괴담에는 유독 '음식'과 연관된 내용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선조들은 귀신이 밥을 얻어먹지 못하면 흉포해져서 자연재해, 전염병 등 각종 변고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거나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는 귀신들은 여귀(厲鬼)라고 불리웠고, 나라에서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대신 성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런 인식이 설화에도 반영되면서 '음식에 집착하는 귀신들'이 '인색하고 각박한 인간들'을 징벌하는 류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섯 가지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시대의 귀신들은 마냥 오싹하고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귀신은 때로는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며 징벌을 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하는 수단이 되거나 선한 일에 복으로 보답하기도 하는 복합적인 존재였다.

여기서 원귀와 악귀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귀신이 가지고 있는 의도'에 달렸다. 아무 이유없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는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귀신 이야기 속에서는 결국 그 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의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이 담겨있는 것이다.
벌거벗은한국사 귀신이야기 원귀 악귀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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