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컷
에무필름즈
정치의 죽음 선언 보다, 새로운 만남 통한 낙관
영화의 제목인 이탈리아 파르티잔 노래의 가사인 '찬란한 내일로'가 함의하듯, 냉전의 격화 속에서도 반파시즘 투쟁의 기억을 간직한 이탈리아 공산당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지역사회에서 '민중의 집' 역할을 하는 당 조직과 일상에서 배포되는 기관지, 공산당 지방정부의 노력을 통해 낙후한 마을의 밤을 밝히는 전기는 20세기 중반 노동자계급이 상상한 미래와 그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의 간섭에 반발한 헝가리 혁명과 이에 대한 소련의 무력 침공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 큰 위기를 초래하고, 부다페스트에서 마을로 공연을 온 헝가리 서커스단과 연대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작은 마을의 당원들도 반으로 갈라지고 만다. 1956년의 이야기를 필름에 담으려는 감독의 사정도 어렵긴 매한가지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젊은 배우는 이탈리아에 공산당이 있었냐고, 이탈리아에 러시아인들이 그렇게 많았냐고 웃지 못할 질문을 던진다. 작업과 생활에서 고집불통인 감독의 모습은 가족들과 갈등을 빚고, 넷플릭스에서 투자를 받으려는 시도는 빠른 속도감을 요구하는 OTT 미디어 산업의 요구에 좌절한다. 부인이 함께 작업하는 젊은 감독은 과잉된 폭력으로 자극을 생산하는 작업이 반파시즘 '네오리얼리즘' 영화감독들의 전통을 잇는다고 주장하고, 분노한 주인공이 밤새 퍼부은 장광설은 부부관계를 파탄으로 치닫게 한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도, 영화예술의 추구도, 심지어 오랫동안 이어온 사랑도 위기에 처한 절박함.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을 헝가리인들에 대한 공감과 당 규율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살하는 결말로 몰아가려 한다. 마치 공산주의와 정치의 죽음, 예술로서 영화의 죽음, 그리고 사랑의 죽음을 함의하는 것처럼.
그러나 난니 모레티는 그렇게 자기파괴를 통해 체념하거나 상상 속에 사라진 과거를 붙잡고 푸념하는 결말로 나아가기를 끝내 거부한다. 영화에 대한 자신의 고집스러운 소신을 비추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코믹하지만, 원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새롭고 우연한 만남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시나리오에 없었던 감정을 배우들의 연기 속에 끌어안으면서, 우발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도취해 모두 함께 춤을 추면서, 그리고 놀랍게도 소주로 '건배'를 외치는 한국인 제작자들과 불신을 넘어 만나게 되면서 말이다.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을 결말로 삼는 대신,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발굴하고 현재화하며 대안적 서사를 구성하는 일은 그런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이 헝가리의 서커스 단원들과, 늙은 감독이 젊은 영화인들과, 낡은 사랑이 새로운 사랑과 시공간을 넘어 함께 행진하는 결말은 역사의 좌절과 굴절 속에서 틈새의 가능성을 열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