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빵야> 공연사진
엠비제트컴퍼니
빵야는 본래 압록강 변의 졸참나무였다. 그리고 몸의 부품은 어떤 집의 대문, 또 어떤 집의 가마솥, 그리고 호른의 일부를 떼어다가 만든 것이다. 식민주의의 야욕이,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이 이들을 나무와 대문과 가마솥과 악기를 총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장총과 장총 주인 간의 유사성이 발견된다. 시대가 누군가를 관동군으로 만들었고, 학도병으로, 인민군으로 만들었다. 또 시대가 졸참나무를 총으로, 가마솥의 쇠붙이를 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총을 겨눠야 했고, 장총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몸을 태워야 했다.
장총은 꿈이 있었다. 바로 악기가 되는 것이었다. 자기 몸을 태워 총알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이리저리 굴려 음악 소리를 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시대의 장벽에 가로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빵야는 암흑의 시대를 견디고 견뎌 다 늙은 후에, 자신의 소박한 꿈을 욕하지 않을 시대가 되고 나서야 꿈을 고백한다.
역사를 소비하는 우리의 자화상
장총은 분명 비극의 시대를 겪었다. 그럼 지금은 희극의 시대일까. 비극의 시대는 아닐지 몰라도, 희극의 시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을 사는 드라마 작가 '나나'는 장총 '빵야'를 만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난관이 있다. 각본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각본을 드라마로 제작해 줄 제작자가 필요하다. 또 시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편성되어야 하니 방송사나 플랫폼으로부터 선택받아야 한다. 이런 현실적 제약은 나나에게 압박을 가한다.
나나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제작돼 시청자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시청자의 입맛에 맞게 적당히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가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장총이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는 어느 정도 각색되어야 하고, 이런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진짜 역사 이야기를 전하겠다는 애당초의 마음가짐은 흐려질 게 뻔하다.
장총이 목격한 역사를 단편적인 여러 개의 이야기로 나눠 풀어내는 옴니버스 형식은 '스타 캐스팅'과 조응하지 못한다. 제작자와 방송사 입장에서는 흥행을 위해 스타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데, 옴니버스 드라마의 특성상 많은 배우가 적당한 비중으로 나누어 출연해야 한다. 그 배우들을 모두 스타로 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은 비중의 배역에 스타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