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성차별 따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그럴 수 있다. 대한민국이 12년 연속 여성 노동권을 평가한 '유리 천장 지수' 꼴찌여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대통령이 한국 사회에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선언한 점이 우려스럽다"고 밝혀도, 30년 가까이 OECD 국가 중 성별임금격차 1위를 기록해도, 19시간마다 1명의 여성이 친밀한 남성에게 살해 혹은 폭력 등의 피해를 봐도 말이다.

당신을 탓할 의도는 없다. 어쩌면 당신도 '한정우'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영화 <파일럿>은 최고의 비행 실력을 갖춘 스타 파일럿으로 고공 행진하던 '정우(조정석 분)'가 순간의 잘못으로 모든 걸 잃고 실직까지 하게 되는 여정을 담았다. 정우는 '실수'라 칭하고, 사회는 '잘못'이라 명명했던 그 순간. 모든 걸 가졌던 남자는 너무나 착했던 탓에 몰락했다. 바로 그 선량한 차별 때문에.

 
 
 영화 <파일럿> 스틸
영화 <파일럿> 스틸롯데엔터테인먼트

나이스한 '가부장', 한정우

한정우는 조건만 따지면 좋은 남자다. 파일럿이란 번듯한 직업에 벌이가 좋다. 주변 동료들과 서글서글하게 지내며 단란한 가정도 이뤘다. 유명 방송에 나와 "어머니께서 자식 때문에 희생했다"며 눈물 흘릴 줄 안다. 하지만 정우의 이면에는 일그러진 남성상이 있다.

그는 평소 돈 벌어 주면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한 태도로 집안일을 하지 않고 아내가 수술했다는 것조차 모른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도 아내가 대신 준비한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아들에게 파일럿의 꿈을 강요하며 비행기 장난감을 선물한다.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혹시 남자 생겼냐"고 묻고, 섭섭함을 드러내는 가족에게 "나 같은 사람이 없다"며 큰소리치는 가부장의 정석이다.

어딘가 어긋난 정우의 친절함은 직장에서도 계속된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여성 승무원들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분위기를 풀겠다며 그들을 '꽃다발' 같다고 칭하고, 술을 따라 달라고 한다. 의도와는 별개로 결과는 처참하다. 싸늘해진 식당, 수치심과 분노가 뒤덮인 직원들의 표정.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정우는 홀로 회식 자리를 누비며 사방팔방 장난을 건다.

누군가 이 광경을 녹음했다. 그리고 고발했다. 한순간에 정우는 직장에서 잘리고 만다. 한 치의 반성 없이 그는 억울해 한다. 곧바로 자신이 따랐던 '아는 형님'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일자리를 동냥한다. 이조차 통하지 않자 새로운 회사에 지원한다. 한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를 향해 "여자는 결혼과 임신 때문에 고민스럽다"고 임신 계획을 캐묻는 순간에도 정우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꽃다발' 사건으로 정우는 재취업에 실패한다. 우연히 만난 후배가 "그 회사 CEO 자리에 여자가 앉으니까, 여성을 더 많이 뽑는다"며 부당함을 토로하자 정우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직접 '꽃다발' 같은 파일럿이 되기로. 정우는 여동생의 힘을 빌려 '정미'로 다시 태어난다.

정우의 차별은 노골적이지 않다. 하지만 위력적이다. 그는 아내에게 모든 집안일과 가정사를 전가하면서 자신을 '괜찮은 남편'이라 칭하고, 직장 내 성적 괴롭힘에 동조했으면서 자신이 '좋은 동료'였다고 믿는다. 또 공고한 남성 집단의 힘에 기대어 재기를 꿈꾸면서 여성 CEO가 여성 할당제에 관심을 갖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정우의 모순적인 행동을 통해 한 인간이 지닌 입체적인 면과 그 안에 담긴 차별적인 지점을 포착한다.

 
 
 영화 <파일럿> 스틸컷
영화 <파일럿>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정우는 모르고 정미만 아는 '차별'

'정미'가 되어 여성 파일럿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한정우. 정미의 하루는 시작부터 난관이다. 정우일 때는 꾸밈없이 다녔지만, 정미는 이른 아침부터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에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첫 출근날, 여성 동료가 "여성 파일럿의 삶이 쉽지 않다"며 문제적인 남자 동료에 대해 언질을 주자 정미는 "나는 그런 부수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한다.

현실은 치졸했다. 남성 동료는 처음 비행을 맡은 정미에게 "첫 경험 아니냐"며 성적인 농담을 던지고, 자신과의 호흡을 논하다가 "우리 궁합은 어떨 거 같냐. 어른들의 궁합은 다르지 않냐"며 점점 수위를 높인다. 결국 정미는 참지 못하고 불쾌감을 표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러면 왜 나한테 그런 태도(친절한)를 보였냐"는 역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미는 일상 속 차별을 느낀다. "어려운 일은 남자가 잘한다"는 동료의 말에, 술자리에서 얼굴 평가를 듣고 당황하는 여성 파일럿의 모습에 정미의 태도가 달라진다. 이후 성희롱을 고발한 동료 파일럿이 부당한 대우를 받자, 제일 먼저 나서 "차별적인 행동"이라 지적한다.

영화 <파일럿>이 의도적으로 성차별을 부각하거나 연출한 건 아니다. 단지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바꿨다. 비슷한 방식인 넷플릭스 <거꾸로 가는 남자> 또한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역할을 뒤바꾼 '미러링'(서로 적대하는 상대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 하며 상대로 인해 받았던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되돌려주는 행위 - 기자 말)'을 통해 성차별을 짚어냈다. 반바지 입은 남자와 정장 차림의 여자, 남성 해방 운동을 하는 남자와 "부엌은 저쪽"이라며 비아냥대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러한 '미러링' 연출을 통해 관객은 일상 속 숨은 성차별을 체감하게 된다.

 
 
 영화 <파일럿> 스틸컷
영화 <파일럿>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성평등은 모두에게 이롭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성차별이라는 말은 쉽게 꺼내지 못하는 낙인의 언어가 됐다. 역사학자 캐럴 앤더슨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과거 <폴리티코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에게는 평등이 억압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차별을 인정한다는 건 원래 타인의 몫이었던 나의 특권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렇기에 평등이 오히려 역차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평등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일럿> 속 정우는 차별적인 시각을 내려놓자, 긍정적인 변화를 맞았다. 아들을 돌보며 발레복을 선물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와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게 되었다. 여성 직원과 동료가 되어 어울렸고 정우 역시 남성으로서 강요받았던 성 역할과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그제야 정우는 한정우도, 한정미도 아닌 사람 '한정우'로서 해방감을 느낀다.

영화 <파일럿>은 사소한 일상에서 차별을 감지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한국 사회에 공고한 성차별과 성평등이 열어갈 새 시대를 생각하게 한다. 게다가 풀어내는 방식도 유쾌하다. 아직도 '꽃다발같이 예쁜 우리 여성 직원들'이란 표현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면, 일단 이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깨달음은 111분 이내에 찾아온다.
 
파일럿 조정석 성차별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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