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끝난 후 커튼콜 때 촬영.

공연 끝난 후 커튼콜 때 촬영. ⓒ 편성준

 
때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에너지가 한 곳으로 모이는 경우가 있다. 지난 28일 본 연극 <장녀들>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작품도 아니고 일본 여성 소설가(시노다 세츠코)가 쓴 중편 모음집을 원작 삼아 4시간짜리 극으로 구성하고 30명의 배우를 불러 모아 연습을 하고 그걸 하루에 다 연속 상연하는 작품인데 예매 공고가 뜨자마자 전회·전석매진이라니. 이런 건 만드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어떤 '믿음'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이벤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마음 한 뜻으로 움직이게 한 결정적 요인은 각색과 연출을 맡은 서지혜에 대한 신뢰였을까 아니면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작품이라는 것만 듣고 앞다투어 모여든 김화영, 남동진, 이도유재, 이진경, 서지우, 김동순, 황정민, 최무인, 김귀선 등 쟁쟁한 배우들에 대한 팬심 덕분이었을까. 

연극 <장녀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치매나 당뇨를 앓고 있는 부모님을 모시는 자식들의 '돌봄'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상처를 보여주는 가정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인 스토리를 조금만 들춰보면 서지혜의 연출은 그동안 '의무감을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규정된 장녀들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로 시작해 '가족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같은 본질적인 질문에서 페미니즘적 시각까지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간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3시간 45분에 달하는 연극이 모두 끝난 뒤 아내와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서지혜는 괴물이다"였다. 그의 치열한 고민과 자신감, 그리고 미친 추진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뜻이다.

배우 연기만큼 놀라웠던 무대 구성-공간 변환
 
 주연배우들. 공연장 커튼콜 때 촬영.

주연배우들. 공연장 커튼콜 때 촬영. ⓒ 편성준

 
1부에서 나오미 역을 맡아 열연한 이도유재 배우는 물론  2부 유리코 역을 맡은 이진경 배우, 3부 퍼스트레이디 게이코 역을 맡은 서지우 배우까지 얼마나 연기를 잘하고 성의가 있던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치매와 당뇨를 앓는 엄마 역을 맡은 김화영 배우와 황정민 배우의 연기도 완벽에 가까웠다. 이 밖에도 늘 에너지가 넘치는 남동진 배우의 1인2역도 더할 나위 없이 멋졌다.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찾아본 인터뷰에서 이도유재 배우는 이 연극을 보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누구나 삶의 무게를 가지고 어려운 과정을 견디며 사는 것이구나'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동진 배우는 "연극배우로 살면서 대표작 하나는 만들고 가자는 심정으로 이 작품에 임했다"라는 개인적 심경을 밝혔다.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놀라웠던 게 무대 구성과 공간 변환이다. 이 연극은 실험극도 아니고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이라 잘못하면 동선이 지루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서지혜 연출을 비롯한 스태프들의 치열한 고민과 디테일 설정 덕에 무대는 상연 시간 내내 입체적으로 돌아갔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첫 번째 기차역 신이 나는 참 좋았는데, 이는 나중에 비슷하게 파티장과 술집 등으로 재현돼 수미쌍관의 감동까지 주었다. 

일요일 낮에 어떤 공연에 네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마'와 같은 말이다. 이건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 만으로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나는 당장 푯값을 내준다고 해도 핑계를 대고 오지 않을 사람을 열 명 쯤 알고 있으니까.

연극이 끝나기 전, 그리고 끝난 후에도 극장 로비엔 이 연극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관객들과 연극 관계자들로 붐볐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개인의 이익이나 이해는 잠깐 접어두고 뭔가 공통의 보람과 의의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내게 연극 <장녀들>이 전해 준 게 바로 그것이었다. 연극은 8월 4일 일요일까지 딱 8일 동안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한다. 

● 원작 : 시노다 세츠코 
● 각색/연출 : 서지혜 
● 출연 : 이도우재 이진경 서지우 김화영 김귀선 황정민 최무인 남동진 김동순 등 
● 기간 : 2024. 7.28~8.4 
●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주최 : 프로젝트 아일랜드 

 
 공연 당일 공연장 엘리베이터에 있던 포스터.

공연 당일 공연장 엘리베이터에 있던 포스터. ⓒ 프로젝트 아일랜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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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읽는 기쁨』 등 네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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