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SPO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병훈씨

2015년 SPO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병훈씨 ⓒ SPOTV


전 프로야구 선수이자 해설위원이었던 이병훈씨가 별세했다. 지난 12일 프로야구 OB 모임인 '일구회'는 이씨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알려졌다. 향년 57세, 빈소는 수원 성빈센트병원이고 발인은 14일이며 장지는 화성 함백산 추모 공원이다.

이병훈은 선린상고와 고려대를 거쳐 1990년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에 1차 지명을 받으며 프로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LG와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보냈고 1997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KBO리그 통산 성적은 7시즌 동안 516경기에 출장해 타율 .267(1317타수 352안타) 38홈런 169타점 136득점이었다.
 
이병훈은 프로야구 데뷔와 동시에 우승멤버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LG 입단 첫해인 1990시즌 이병훈은 72경기에 출장, 타율 .258, 1홈런 19타점 15득점을 기록했고, LG는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LG가 창단한 첫해이자 전신인 청룡 시절을 포함해도 첫 우승이었다. 이병훈은 신인임에도 한때 우승팀의 4번 타자를 꿰차기도 했고,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결승 2타점 적시타를 터뜨리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우승에 기여했다.
 
선수 개인으로서 가장 빛났던 시즌은 1992년이었다. 비록 규정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92경기에 출장하여 정확히 타율 3할(263타수 79안타) 16홈런 45타점 34득점의 성적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후 이병훈의 야구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1993년 109경기에 출장했으나 타율 .256(281타수 72안타) 6홈런 23타점 출루율 .298에 그치며 성적이 폭락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해태 타이거즈와 4대 2 대형 트레이드로 인하여 김상훈과 함께 LG를 떠나 유니폼을 바꿔입었다.
 
이적 첫해에는 해태에서 꾸준히 기회를 얻으며 개인 최다인 92안타를 때려내는 등 잠시 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5년 주전 경쟁에서 밀려 고작 32경기 출전에 그치며 다시 입지가 흔들렸다. 1996년에는 다시 시즌 중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삼성에서는 1997년 초 두 번째 음주 운전으로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사고 후유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이 어려워지며 그대로 은퇴했다.
 
이병훈은 선린상고와 고려대 시절까지만 해도 투수와 야수를 넘나들며 아마추어 최고의 유망주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를 프로에 처음 지명한 LG는 김동수에 이어 1차 지명 2순위라는 높은 순번으로 지명했고, 당시 백인천 LG 감독과 김응용 해태 감독 등 당대의 명장들도 하나같이 우타 거포로서 이병훈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은퇴 후 더 이름 알린 야구해설위원
 
그러나 프로에서는 부정확한 타격 기술과 자기관리 실패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유난히 술을 좋아했던 이병훈은 음주 운전만 두 번이나 저질렀고 결국 부상으로 스스로의 선수 생명까지 갉아먹는 자충수가 됐다.
 
또한 이병훈은 프로 첫해 우승 멤버가 되는 행운도 누렸지만, 1994년과 1996년, 두 번의 트레이드를 당했을 때는 자신이 나가자마자 전 소속팀이던 LG와 해태가 그해 우승을 차지하는 묘한 징크스를 얻기도 했다. 해태 시절 은사였던 김응용 감독은 자신이 지도한 제자 중 재능에 비하여 대성하지 못한 선수의 하나로 이병훈을 꼽으며 안타까워한 바 있다.
 
평범한 선수로 잊혀졌던 이병훈이 오히려 은퇴 후 야구팬들에게 더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야구해설위원 활동이었다. 이병훈은 2001년 SBS 라디오 해설위원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끝에 2006년 K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선임되며 당대의 간판 해설위원 중 한 명이 됐다.
 
이병훈은 현역 시절부터 유쾌하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유명했다. 해설위원으로서는 전문적인 야구 용어나 분석보다는 현역 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야구선수 특유의 '썰'이나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맛깔나게 풀어놓는 만담가형 해설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LG를 떠나 엄격한 군기로 유명했던 해태 이적 이후, 김응용 감독과 김성한, 이순철 등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들과 지내면서 경험했던 각종 웃픈 사건들을 털어놓은 일화는 지금도 야구팬들에게 종종 회자될 정도다.
 
한편으로 이병훈이 해설위원으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은 당시 한국프로야구의 중흥기와 맞물려 방송 중계 역시 틀에 박힌 형식에 벗어나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직설적인 스타일이 유행하던 시기로, 이병훈이 시대적 흐름의 수혜자가 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만담 이미지에 가려졌을 뿐 진지할 때는 경기 흐름이나 선수-감독의 성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예측력으로 전문가다운 날카로운 안목을 과시하기도 했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던 다른 전문가들과 달리, 류현진의 몸값과 성공 가능성 등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전문가도 이병훈이었다.

야구팬에게 즐거움 선사한 '유쾌한 아저씨'
 
비록 이병훈의 해설 스타일은 야구팬들의 호불호가 엇갈렸지만, 대중적으로는 큰 화제가 되었으며 인기를 바탕으로 예능프로그램과 영화-드라마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병훈의 아들 역시 대를 이어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2년 5월에는 의로운 행동의 주인공으로 뜻밖의 이슈가 됐다. 심야에 아들과 야구 연습을 하다가 우연히 성추행범을 발견하게 된 이병훈은, 범인을 추격하여 직접 격투 끝에 제압하고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이병훈은 경찰로부터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했다. 당시 많은 야구선수들이 사생활 문제와 사회적 책임감 부족으로 많은 질타를 받던 시기였기에, 불의를 보고 참지 않았던 '사나이' 이병훈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병훈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야구계와 방송에서 모습을 감췄다. 해설위원도 보다 전문적인 분석력과 논리적인 언변을 갖춘 해설가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건강 악화로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했고,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계속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한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장면은 이병훈이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 됐다.
 
이병훈은 평범한 커리어를 보낸 야구선수도 특유의 개성과 입담을 살려서 해설자와 방송인이라는 또 다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스포츠 해설에 있어 굳이 전문 지식이나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지 않더라도, 쉽고 재미있는 표현을 통하여 시청자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있음을 증명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야구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던 '유쾌한 아저씨'는 안타깝게도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나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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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 프로야구선수 해설위원 해태타이거즈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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