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Am I OK?> 스틸컷
영화 스틸컷HBO max
 
2022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며 큰 주목을 받은 영화 < Am I OK? >가 공개되었다. <소셜 네트워크>, <로스트 도터> 등의 작품에서 존재감을 각인시킨 배우 다코타 존슨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소노야 미즈노와 공동 주연으로 합을 맞추었다.
 
'나 괜찮은 걸까?(Am I OK?)'라고 묻는 이 영화는 다코타 존슨이 분한 주인공 '루시'의 성적 지향성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하지만 소재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완전한 '퀴어 로맨스' 영화의 작법을 따라가지는 않는데, 이는 본작이 더욱 개성 있는 영화로 거듭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늦은 깨달음이라는 건 없어

32살의 '루시'는 화가의 꿈을 잠시 접어 두고 스파숍에서 일하는 중이다. 따분한 그의 삶에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절친 '제인'의 존재뿐이다. 하지만 제인은 직장에서 예상치 못한 승진을 하게 되어 런던으로 떠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루시는 제인을 위해 기뻐해 주고자 하지만 축하 술자리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루시가 오열한 이유는 단연 제인이 떠나서만은 아니었는데, 바로 제인이 술을 마시던 도중 학창 시절에 한 여자 동급생과 키스한 경험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 고백이 루시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기폭제가 되었는지, 그는 자신이 지금껏 동성애자였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인은 그런 루시를 성심성의껏 다독여 주지만, 루시는 지금껏 자신이 오랫동안 헛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둘의 대화는 어른이 된 후에야 자신의 지향성을 알아차린 루시의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거 전부 다 아홉 살쯤에 알아차리잖아."
"아홉 살? 난 아홉 살 때 강아지 흉내 내면서 사람 만날 때마다 짖고 다녔어."
 
이 짧은 대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성적 지향성이나 정체성이 어린 시절에 명확하게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곤 한다. 이는 실제 성소수자의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묘사하는 미디어의 태도에 기반한 오해다.
 
 드라마 <유포리아> 스틸컷
드라마 <유포리아> 스틸컷HBO max
   

성적 지향성이나 정체성은 곧 어떠한 형태의 사랑과 직결되기 때문에, '로맨스'를 플롯의 중심에 둘 수 있는 하이틴 작품에서 소재로 차용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의 <하트스토퍼>와 HBO의 <유포리아> 모두 고등학생들의 일상과 연애를 다루고, <섹스 라이브즈 오브 칼리지 걸스>는 대학 신입생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미디어 속에서의 '퀴어성'은 젊음과 사랑이라는 개념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 Am I OK? >는 이러한 경향성을 인지하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에 늦었을 때란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 줌과 동시에, 퀴어 영화가 제시해야 할 담론의 확장을 시도한다.
 
중요한 건, 삶의 주체성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깨달은 루시는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그에게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제인에게 떠밀려 연애 시장에 발을 들이게 된다. 레즈비언 클럽에 출입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직장 동료 '브리타니'와 데이트를 시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삶에 있어 큰 변화를 바라지 않던 루시는 제인의 적극적인 지원을 부담스러워하고,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제인과 절교 직전에 다다르기까지 한다.
 
본작의 주 여정은 루시가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저변을 늘리는 과정에서 소원해진 제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루시는 브리타니와 잘되나 싶었지만 브리타니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와 재결합하면서 관계를 흐지부지 끝맺고, 스스로 데이팅 앱을 깔아 여러 사람을 만나 보지만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제인의 등쌀에 이기지 못해 시작된 루시의 새로운 삶은 루시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향한다. 브리타니와의 어색하고 짧은 연애는 루시가 그동안 일하던 스파숍을 떠나 다시 예술가의 삶을 모색하기로 결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한편, 제인은 자신이 급한 마음에 루시를 너무 재촉했음을 깨닫게 되고, 둘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던 식당에서 재회한다. 맨날 관성적으로 같은 메뉴를 시키던 루시는 이제 새로운 음식을 과감히 시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는 마침내 런던으로 떠나게 된 제인이 슬퍼하자 자신도 런던으로 따라가겠다고 선언하는 루시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영화 <Am I OK?> 스틸컷
영화 스틸컷HBO max
   

영화의 소재나 전개 내용상 관객들은 루시와 제인이 '최종 커플'이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고, 본작의 제작진도 이를 노린 듯하다. 하지만 루시와 제인은 서로의 필요성을 인지하면서도 친구 관계로 남아, 엔딩에서 둘이 앞으로 펼칠 새로운 우정의 지평을 보여준다. 다소 싱거운 마무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작의 주 내용은 모든 방면에서 소극적이던 루시가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정이다.
 
루시는 자신의 지향성을 깨달음으로써 삶의 주체성을 회복했고, 그 삶 속에는 연애도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인생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닐 것이다. < Am I OK? >의 '해피 엔딩'은 동화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한 여성의 자아 확립인 셈이다.
 
담백한 퀴어 이야기가 보고 싶지만, 동시에 성소수자의 삶을 '연애담'으로 축소하는 미디어에 질렸다면 < Am I OK? >를 시청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엠아이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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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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